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사이렌: 불의 섬>을 보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것이 깃발을 빼앗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의 집을 최대한 헤집어 놓는 게임 같았다는 것이다. 규칙상으로는 깃발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구조지만, 실제로 화면에 남는 것은 깃발보다 집의 상태다. 무너진 벽, 어질러진 침대, 부서진 가구. 승패가 결정된 뒤 남는 것은 그 잔해의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이 예능에서 가장 처참한 장면은 몸을 부딪히며 싸우고 결국 패배하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 망가져버린 허무한 광경에 있다. 한 번 헤집어진 집은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지 전 승리의 가장 큰 혜택인 ‘빼앗은 기지에 깃발을 숨길 수 있는 권리’를 활용한 팀은 없었다. 아무도 남의 집이었던 곳에는 깃발을 숨기지 않았다. 즉 패배한 기지는 끝까지 게임에서 버려지고 사용되지 못한다. 이는 게임을 설계한 제작진의 실책일까. 그보다는 같은 직업군에서 오는 여성들 사이의 강력한 유대에 기지라는 공간이 또 다른 동료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의 흥미로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소방팀이 견고해 보였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들이 끈끈하게 결속을 다지던 모습도 있었지만, 유독 생활의 흔적이 짙게 배던 네모하우스의 모습 역시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이 공격받는 장면은 단순한 전략적 대결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침범처럼 느껴진다.
아레나 전 이후 주어진 한나절의 휴식 역시 기억에 남는다. 소방팀과 운동팀이 누린 짧은 평온과,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군인팀과 경호팀의 지루한 긴장감. 같은 공간, 같은 섬에 있지만 어떤 팀은 쉼을 허락받고, 어떤 팀은 끝없는 대기 속에 놓인다. 그 차이는 단순한 게임 규칙의 결과이지만, 묘하게도 삶의 리듬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흥미로운 건 각 팀마다 진짜 유대가 형성되는 순간은 대부분 방송에 나오지 않은 일상의 시간에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함께 샤워실을 기다리며, 운동을 하며, 아까의 싸움을 복기하며 자기 전 나눴을 들뜬 농담과 대화. 다 기록되지 않았을 비밀스러운 생활의 단면은 차례로 쌓여 시청자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이들 사이의 결속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렌: 불의 섬>이 회복시킨 것은 직업인으로서 여성들의 '일상'이라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여성 직업인으로서 이들이 '일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의 얼굴까지 보여주고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차별화된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싸움이 조금은 놀이 같아서 좋았다. 깃발 하나 뽑는 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몰입해서는 직업의 명예씩이나 걸고 승부를 겨룬다는 게 좋았다. 때로는 10분 만에 허무하게 게임이 끝나도, 그 집중의 밀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간절하게 쌓아온 일상의 두께가 있다.
이 대결은 승패보다 태도의 문제처럼 보인다. 얼마나 진심으로 임했는지, 얼마나 진지하게 놀았는지. 이 프로그램은 물질적인 의미로도, 또 다른 의미로도 각 직업군을 대표하는 여성들이 집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그 집은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고픈 공간이면서도, 강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잠시나마 허락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성 직업인의 재현이 강함·버팀·쓸모·성과 증명에서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동료로 느끼는지, 어떤 순간에 직업적 자부심을 갖는지' 등 더욱 다채로운 관점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사이렌: 불의 섬>이 가지고 있는 여성 예능으로서의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