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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Mar 06. 2022

영화보다 값진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소모임을 하고 있다. 그때그때 영화를 정해서 보고 온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보이후드>도 모임의 영화 중 하나였다. 이미 이 영화를 한 번 봤던지라 다시 한 번 영화를 보고 소모임에 갔는데, 그 말을 들은 한 친구가 자긴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진 않다며, 이런 애가 있었지 스쳐 지나간 그대로 남겨두고 싶다 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무언가 가슴에 확 와닿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니 이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이렇게 뭔가를 써보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 영화의 물결을 거스르려는 것만 같아서 조금 내키지 않는 마음 하나. 그래도 뭔가를 써보고 싶은 마음 하나. 일단은 후자로.


사실 전자의 마음은 <보이후드>를 두 번째로 보게 되었던 순간에 이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중에도 시간은 간다. 영화를 보는 일은 내 시간을 그 영화 위에 잠시 올려놓는 것인데, 재미있는 건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도 영화는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 찍어둔 영상을 볼 때나 예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할 때처럼 이미 본 적 있는 장면을 다시 꺼내놓는 것이다. 일직선으로 가는 듯 보이는 인생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복이라는 고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과거를 떠올리거나, 영화를 두 번 보는 게 그런 일들이다. 그런데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은 정말 매 장면을 눈앞에서 재현하는 것이기에 회상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보이후드>는 재현으로 반복하는 것보다 회상으로 반복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한 인물의 성장을 동행한 이 영화는 영화보단 삶의 색채를 더 가지고 있으니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주인공 메이슨의 성장기를 다시 되감으며 첫 장면부터 울컥했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보이후드>는, 하늘을 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아니라 그 아이가 바라보는 하늘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뒤에야 보이던 메이슨의 푸른 눈. 영화가 먼저 하늘을 보여주고 눈동자를 보여줄 때, 나는 순간 그 하늘을 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단지 재현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라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뒤늦게 설명을 붙일 수 있을 거 같다. 성장기 내내, 어쩌면 인생 내내 변하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눈동자와, 그 눈으로 바라보는 하늘, 그 푸르고 넓은 여백을 영화는 끊임없이 소환시켰다. <보이후드>를 다시 보는 일은 메이슨을 따라가는 것과 동시에 내 속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과정이 되었다.



어떻게 영화는 그렇게 할까. 메이슨이란 아이는 지금껏 봐온 영화 속 어떤 인물보다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속의 첫 해. 동네 형과 낄낄거리며 놀던 메이슨은 잠시 뒤 혼자 있게 되자 죽은 새를 말없이 땅에 묻는다. 그리고 이사 가는 씬. 사만다가 집의 여러 잡동사니에 작별인사를 건넬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메이슨이 이렇게 안녕을 건넨다. "굿바이 록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는 할머니". 누구도 눈길 주지 않을 것들에 주목하는 아이. 아이가 점차 자라나며 그의 침묵이 짙어지는 동안 영화는 그에게 세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이윽고 사진을 찍게 된 그가 바라보는 대상. 풋살 경기를 찍으러 간 그는 운동장이 아닌 열띤 응원을 펼치는 관람석과 작전을 지시하는 벤치를 찍고 있었다. 아름다운 개연성이다. 메이슨에게 영화가 입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우리 개개인이 삶을 거치며 '내'가 되어갔던 시간을 소환한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각자만의 맥락이다. 이 영화가 그걸 짚어내는 동안 나 역시 나의 줄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그 맥락을 되짚어보는 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지금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 대한, 나는 그렇게 자랐지, 그렇게 살았지, 하는 방식의 회상을 통해서나마 나를 정의 내린다. 이 영화가 어느 정도 회상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짜임새를 무시한 무의식의 발현 그대로. 그것은 영화가 아닌 인생의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건은 파편적이다. 영화는 그 많고 많은 메이슨의 시간 중 어떤 시간을 선택해 160분 동안 붙여놓았나. 거기엔 어떤 규칙도 없다.  전혀 기억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 역시 회상 속에선 뜬금없이 등장한다. 내게 눈길을 줬던 여자아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 <보이후드>엔 이러한 메이슨의 단편들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가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의 나를 되짚어가는 것은, 동시에 지금을 밟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이 그 회상의 끝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도착역이자 현재의 출발역. 거기서 그간 쌓아온 인과는 아무렇지 않게 없어지기도, 예기치 못하게 되살아나기도 한다. 몇 년을 같이 살았던 이종 남매와는 다신 만나지 못해도, 단 몇 분 만났던 수리공과는 재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후드>가 전적으로 메이슨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엔 누나인 사만다, 엄마인 올리비아, 아빠인 메이슨 시니어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영화는 메이슨의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종종 그가 없는 등장인물의 시간과 공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재현은 없다. 모든 순간이 원본이다. 많은 순간들이 회상처럼 보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공유한 이들이라도 그 순간부터 우린 각자의 원본을 갖게 된다. 영화는 사만다는 사만다의, 올리비아는 올리비아의, 메이슨은 메이슨의 원본이 저마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그 원본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메이슨을 가지고, 또는 내가 자라온 시간을 가지고 <보이후드>를 몇 번이고 다시 찍는다면 그건 하나하나가 반드시 다른 영화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이루고 있는 건 과거의 나. 그렇다면 과거의 내가 존재해온 방식은 지금의 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회상에 빚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영화의 끝은 '바로 지금'을 표현했어야 했다. "인생은 늘 도착과 출발의 연속이니". 메이슨 시니어와 그의 아내가 부른 노래의 마지막 소절. 도착과 출발이라는 찰나의 지점에 관한 영화. 마지막 장면. 바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메이슨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내내 달려왔다. 그게 가장 현재의 순간이라서. '우릴 붙잡는 그 순간'을 담아내는 이야기. 과거, 그 지나온 시간을 걸어온 <보이후드>가 메이슨의 입을 빌려 'always right now'를 말하며 끝이 난다. 원본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내 모든 과거가 여기 들어차 있고 내 현재가 여기서 진행되고 있으며 내 미래가 이곳에 잠들어있다.




다시 말해 <보이후드>는 삶이 되고자 한 영화다. 어쩌면 삶을 향한 가장 명징한 한 가지 진실. 지금, 나는, 여기, 존재하고 있음. 그걸 말하기 위해 삶이 작동하는 방식을 끌어다 온 영화. 그러나 <보이후드>는 또한, 그것에 실패한 영화다. 이 영화 역시 매 순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과거가 되어버릴 순간의 모음이다. 메이슨의 현재마저도. 소모임 친구가 그랬듯 이 영화는 우리가 스쳐 보낼 누군가의 삶을 닮은 무엇이다. 내가 영화를 다시 본 것은 재현의 방식이 아니었음을 알았지만, 나는 나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낸 듯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마음을 다해 삶이 되는 일에 실패한다. <보이후드>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임을 알고 있다. 그 이유로 나는 이 영화에 빚진 기분이 든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잠시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었다. 책을 읽는다거나 혼자 가사를 쓴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장 내가 해야 될 것만 같은 무언가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되고자 했던 게 이런 내 보잘것없는 삶이었다니. 별다른 특색도, 재능도 없어 불만족 투성이인 나의 작은. <보이후드>는 우리 삶이 모두 영화 같다는 걸 일깨워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는, 모든 영화는 끝내 삶이 되지 못해 불완전함을 고백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니 반복하건대, <보이후드>는 삶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그것에 실패한, '영화'다. 감히 말해도 될까. 삶이 가지고 있는 그 불완전함으로 완전한 원본은 영화가 언제나 꿈꿔온 이상향이다. 넘어지고 일어나기도, 다치고 치유하기도, 상처와 위로를 주고받기도, 화려했다가 초라하기도, 피었다가 주름지기도, 어쩌다 탄생해서 반드시 소멸하는 그 모든 시간은 저마다의 울퉁불퉁함을 가진 비탈길이 된다. 삶은 그 누구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다. 개개인의 마음은 우주와 같아서, 우주의 암흑처럼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한 채로 죽게 될 것이다. 그 불가사의를 아우르는 단어, 인생. 나는 그런 인생이 되지는 못한 <보이후드>가 우리를 향해 되뇌는 것 같았다.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거라고. 이 말에 진정 닿기까지 나는 얼마나 긴 시간을 바쳐야 할까. 나는 내 삶이 아름답다고 믿어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게 지금의 최선이다. 나는 자격증 공부를 할 테고, 영어 공부를 할 테고, 취업 준비를 할 테고, 그냥 그렇게 살아갈 테지만. '뭐가 더 있는 줄' 착각해가며 언젠가 장례식만 바라보며 살게 되겠지만. 그저 생존해간다는 말, 곧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말이 죽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변명임을 증명해가며 살고 싶다. 그리고 그 관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삶을 꽉 차게 바라보고 싶다. 당신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영화보다 값진 그것.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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