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 하고 몇 번 발음하다 보면 이 이름은 성이 없이도 참 온전하다는 기분이 든다. 김찬실인지, 박찬실인지, (실제론 이찬실이지만) 뭐가 됐든 찬실이면 됐다는 기분. 빛날 찬에 열매 실을 쓴단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모과처럼 ‘빛나는 열매’라는 뜻. 영화의 종반부 손전등을 든 채 후배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는 찬실은, 밝혀주는 자이면서 빛나는 자이기도 하다. 빛남과 빛냄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아름다움. 그때 찬실이는 비로소 찬실(燦實)처럼 보인다. 성뿐만이 아니다. 찬실이는 영화 산업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전문직 출신의 40대 실업자 비혼 여성’이다. 하지만 그러한 특정 집단이나 사회 계층을 대표하기 이전에, 찬실이는 그냥 찬실이다. 복 많은 찬실이.
장국영(김영민)은 찬실이(강말금)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충분한 설명은 될 수 없겠지만, 영화 내내 이 인물이 꼭 찬실이에게 존재하는 ‘영화’가 극화된 캐릭터 같았다. 장국영은 찬실이의 삶을 바꿔놓지 못한다. 영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찬실이의 말을 들어주고 그에게 조언을 해주지만, 결국 찬실이는 영이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니까. 장국영은 그 결과를 바꿔놓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내내 찬실이 곁에 머물면서, 찬실이가 삶을 찾도록 도와준다. 유령이지만 실재하고, 필요할 때면 나타나 우리를 위로해주지만 삶의 방향을 직접 틀어주지는 못하는, 그러나 우리에게 이미 잠재되어 있던 것들을 쥐여준 뒤 스스럼없이 물러 날 줄 아는, 영화.
찬실이는 장국영으로부터 반도네온을 건네 받는다. 장국영이 찬실이에게 그걸 연주하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다. 찬실이는 이미 반도네온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찬실이에게 반도네온을 건네주는 존재일 뿐. 하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던 '나'에게 나를 사려 깊게 인도해주는 존재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곧 카메라는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찬실이를 서서히 줌인한다.
영이(배유람)와 처음 친해지던 소파에서 천천히 줌인해 들어갔던 카메라는 그것이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일임을 상기시켰다. 소피가 들어오며 그 흥이 깨지던 때의 급격한 줌아웃, 그리고 소피를 사이에 두고 정전기라는 영화적인 순간에까지 다시 줌인해 들어가던 움직임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앞선 장면의 줌인은 다시 찬실이가 본바탕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클로즈업이다. 영화는 장국영을 화면 바깥으로 잠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찬실이로 채운다. 마침내 화면에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게 된 찬실이가 말한다.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약간의 줌아웃. 다시 화면에 불러 들어온 장국영은, 영화는, 찬실이에게서 마땅히 물러난다.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한다고. 왜 아니겠는가. 영화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존재로 남을 테니. 이제 찬실이는 할머니가 쓰던 한글처럼 또박또박 삶을 적어나갈 것이다. 비록 받침은 어렵고 모든 게 정확한 글씨는 아닐 테지만. 오롯한 시처럼 살 수 있을 거다. ‘영화를 해야만 살 것 같았던’ 목마른 그 시절을 함께한 장국영을 오래오래 기억하면서.
자기가 영화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주던 책과 잡지, DVD를 모두 버리는 일이, 영화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삶을 지켜내는 법이 된다는 건 내겐 너무 아득한 감정.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삶으로 다시 한번 영화를 시작한다는 것도. 영화가 나를 꽉 채워줄 것 같았던 찬실이는, 이제 영화 없이 사는 법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삶에는 다시 영화가 필요했겠지. 이건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진 정말이지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아무거나 써도 된다고 그랬지. 아무렇게나 쓰라고는 안 그랬는데.
숙제로 시를 써야 한다는 할머니(윤여정)와의 대화에서 찬실이는 이렇게 말했다. 찬실이는 이제 정말 이 말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아무거나는 쓰지 못했을 찬실이. 영화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무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찬실이. 하지만 그 아무거나는 또 아무렇게나가 아니므로, 찬실이의 아무거나는 할머니의 시처럼 찬실이가, 또 찬실이가 사랑하는 영화가 담겨있을 것이다. 김초희 감독이 쓴 <찬실이는 복도 많지> 시나리오가 그렇듯. 영화를 사랑한다고, 찬실이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상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난 이여야만 그 대상을 직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걸 테니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정말 큰 달이 뜬 밤. 전구를 사러 가는 찬실과 후배들. 할머니 집까지 굽이굽이 올라왔던 오르막길을 이제야 내려가는 찬실이. 그가 처음으로 내리막을 걷는다. 꼭 같이 또 영화를 만들자는 후배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찬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한다. “먼저 가라. 내 비춰줄게.” 찬실이는 꼭 영화가 되어, 뒤에서 빛을 밝힌다. 영화가 그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제 그가 누군가에게 영화가 되어 줄 차례다. 그건 삶을 아는 이여야만 가능한 일.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그게 무엇인지를 알고 그걸 간절히 바라게 된 사람이어야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그렇게 바로 서게 된(혹은 이 영화를 통해 그렇게 될) 한 사람이 우리 뒤에서 간절히 쏘고 있는 빛으로 영사되는 영화다(감히 그렇게 느낀다). 찬실이는 삶을 안아준 뒤에야, 영화가 되었다. 그가 영화를 시작하게 했던 정은임의 영화 음악, 게스트 정성일이 인용한 말처럼. 길고 긴 필름 터널의 끝이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려나 보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