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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r 09. 2022

밀실과 광장의 예술, 영화

<For the First Time>, <제너럴>, <시네마 천국>

Octavio Cortázar, <Por primera vez(For the First Time)>


유튜브에서 9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For the First Time>(1967)을 봤다. 1967년 4월 12일, 쿠바의 Los Mulos라는 마을에서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영화를 보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 초반, 영화를 사랑하는 두 사내는 그들의 '시네마 트럭'에 갖가지 영사 장비를 싣고 산골짜기 마을로 간다.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 그들은 다름 아닌 '영화'를 싣고 마을로 갔다. 최초의 영화 이름을 바꿔서, 이 작은 마을 입장에서는 이 소동을 '영화의 도착'이라고 부를 것만 같다. 아무튼 마을에 도착한 사내들은 저녁 상영을 앞두고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이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Movie'와 'Cinema'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섞어 쓰는 모습이었다. 영화를 표현하는 많은 영어 단어 중 Movie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Moving Picture의 줄임말이자 보통 영화의 대중적, 상업적 성격을 강조할 때 쓰인다. Cinema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유래한 단어로 유럽식 표현이다. 현재는 영화의 예술적 성격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Movie와 Cinema는 그 어감에서부터 분명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 아이가 영화를 본 적이 없고 Cinema가 뭔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자, 다른 아이가 불쑥 이런 말을 하며 끼어든다. "Cinema is movies". 또 "What is a movie, in your opinion?"이라는 질문에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A movie is all those things you see in the cinema." 이들에게 무비는 시네마 안에 있는 것이고, 시네마는 곧 무비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그리고 마침내, 해가 져 어두워진 마을에서 영화가 상영된다. 마을 사람들이 생애 최초로 보게 된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산업화의 심장을 찔렀던 이 영화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쿠바의 산골짜기를 웃게 한다. 그때 이 영화는 시네마보다 무비에 가깝고, 때로는 그 어떤 시네마보다 한 편의 무비가 더 위대하다. 이 마을 사람들의 표정엔 영화를 향한 순수함이 있다. 영화를 처음 볼 때의 환희, 순수함, 동경을 꿈처럼 누군가가 선사받는 순간은 영화의 그 어떤 예술적인 성취보다 커다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자막. "A movie is a beautiful and important thing." 이토록 아름답고 중요한 무비를, 시네마 트럭에 싣고 다니던 이들이 있었다.






2018년 철도 영화제 <제너럴> 야외 상영(출처: 대전아트시네마)


그리고 떠오른 개인적인 기억. 2018년 여름에 대전아트시네마가 주최했던 철도 영화제에 3일 내내 갔었는데, 둘째 날 마지막 프로그램이 옛 충남도청사 주차장에서 열린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 야외 상영이었다. 찰리 채플린과 비교되곤 하는 버스터 키튼의 1926년 흑백 무성 영화.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는 어떤 시네마적인 기대를 하고 갔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상영 장소에 도착했을 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재미'를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내심 오지랖 섞인 걱정을 했다. 사람들이 지루해하면 어떡하지?



버스터 키튼, <제너럴>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 내가 겪은 상영 경험 중 가장 놀라웠고, 가장 즐거웠으며 가장 외로웠다. 맨 앞 줄에 앉은 아이들은 영화란 걸 처음 접하는 것처럼 깔깔거리며 한 세기 전의 영화를 봤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영화제에 온 나는 계속 엄마 생각이 났다. 영화 잘 안 보는 우리 엄마. 그래서 미안했고 왠지 외로웠다. 그렇지만 뭐가 됐든 버스터 키튼은 위대했다. <For the First Time>을 보면서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상영했어도 사람들은 분명 좋아했을 거야, 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밤에 문을 닫은 영화관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위해, 알프레도가 영사기를 광장에 있는 건물 벽으로 돌리는 장면이다. 잊지 못할 장면.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 매체다. <시네마 천국> 속 영화관 Cinema Paradiso에서 관객들은 떠들고, 웃고, 담배도 피우고, 침도 뱉고, 어찌 됐든 다 같이 영화를 본다. 노키즈 존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현재의 우리에겐 믿기지 않을 풍경. 영화란 실은, 광장의 예술이지요. <시네마 천국>은 이 명제를 줄곧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실재하는 광장으로 마법처럼 날아가는 이 장면이 내게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이유 역시, 저 명제가 장면 자체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네마 천국>의 잔카르도 마을 광장에서, 옛 충남도청사 주차장에서, 1967년 쿠바의 Los Molus 마을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 어쩌면 영화의 가장 시네마적인 순간은 광장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더 이야기할 것이 남았다. 광장에서의 영화까지도, 영화는 또한 나와 영화의 은밀한 밀실을 전제하는 예술이라는 것. 내가 <제너럴>을 보던 곳은 즐거운 광장이었고, 나만의 외로운 밀실이었다. Los Molus 마을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저마다의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될 것이다. <For the First Time>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눈동자가 있었다. 밀실처럼, 상영관처럼 깜깜해진 마을의 광장에 눈동자 같은 빛방울 몇 개가 띄워져 있었다.


관객은 각자의 눈을 투영해 영화와 만난다. 그 눈은 사람을 담는 눈과 똑같은 눈. 눈은 가장 본연의 스크린이다. 영화는 그 속에서 비로소 영사된다. 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눈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영화 맞은편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눈들이 증명하는 밀실과 광장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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