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콩나물>
보리가 할아버지와 만났던 순간이 일종의 허구였음이 마지막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통해 밝혀진다. 그러나 또한 보리는 그곳에서 해바라기를 따왔고, 콩나물을 좋아했던 할아버지가 해바라기도 좋아했다는 사실이 이모부를 통해 발화된다. 영화는 이렇게 허구와 진실을 섞어놓는다. 그리고 그건 이 영화가 아이의 세계를 대하는 시선이다. '나 아까 할아버지를 만났어'라고 보리가 말한다면 믿어줄 어른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는 그걸 ('믿는'이 아니라) 믿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중한 영화. 영화 속, 보리의 눈높이에서 보리와 진심으로 눈을 맞춰주는 이는 할아버지뿐이고, 그는 죽은 존재다. 그러니까 그건 영화이기도 하다.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는 해바라기를 보는 보리와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찍는다. 이 쇼트엔 두 사람과 영화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고, 그럼에도 영화는 이 거리를 따뜻한 그리움으로 채운다.
영화 첫 장면. 제사 준비를 하는 엄마와 두 이모 사이에서 보리는 할아버지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는다. 태어난 게 뭔지도 모를 보리는 그 탄생 이전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이 뭔지는 더욱 알 수 없었을 테다. 결국 보리의 여정은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콩나물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향한 여정이 되었다. 그건 보리가 죽음을 모르는 아이였기에 가능한 일.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을까.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만이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음'의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건 영화를 보는 나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고, 실은 영화도 온전히는 할 수 없는 것이고, 아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보리의 여정을 되짚는 건 보리가 아니라 영화니까. 대모험이 끝나고 한낮의 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저녁의 영화는 텅 빈 자리의 순간순간을 반추한다. 보리에게 이 하루 동안의 여행은 언젠가 꿈처럼 남겨질까. 하지만 보리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났듯, 이 여정 역시 살아있는 죽음으로 남겨지지 않을까.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우리의 그리움이 그래서 너무도 영화적인 순간이 되어버리는 영화. 보리가 따온 해가 낮이 가고 온 밤을 밝힌다. 아이인 아이가 어른이 된 아이와 공존한다. 죽음이자 허구인 영화가 삶과 하나가 된다. <콩나물>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영화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