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오면 당연히 좋았다. 풀이대로라면 학습을 놓는 시간, 그러니 억지로 뭔가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방학이니까. 개학을 하고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반 아이들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들은 그냥 똑같은 친구들이었고, 우리는 전과 다름없이 신발이 더러워지고 교복이 찢어지도록 놀았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건 다른 친구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내밀한 시간 속에서 벌어지기도 했을 테다. 애써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배우게 되었고, 배워야만 했던 순간들이 벌어진 틈새처럼 수업과 수업 사이사이에 예정되어 있었다. 영화를 보며, 그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자라나야 했을 그때의 몇몇 친구들을 다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그런 비밀의 순간을 다 알지 못한 채로도 친할 수 있었다.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갔을 때 교실의 아이들 중 누군가는 옥주처럼 저도 모르게 성장해버린 방학을 몰래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표정은 잠에서 깨지 않은 옥주의 표정처럼 여전히 천진하고 맑았겠지. 그러니 다른 아이들은 꿈에도 몰랐을 우리 각자만의 여름밤. 가을을 목전에 두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여름을 견디던 나날들.
방학이 모두 끝나고 제법 쌀쌀한 아침 공기가 느껴질 즈음 학교에 갔을 옥주를 상상한다. 익숙한 교실을 누구보다 낯선 기분으로 들어갔을 그 발걸음을 따라가면 어떤 마음들이 무수히 밟힌다. 옥주야, 방학에 뭐했어? 라는 질문에 어색한 표정으로 그 커다랬던 방학을 손쉽게 얼버무렸을 대답과 비슷한 것들. 그때 많은 아이들이 손 안쪽에 꼭꼭 숨겨 두었을, 결코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손금 같은 것들. 그러니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질기게 우리 몸에 새겨져 평생을 함께 하게 된 기억 같은 것들. 대체 우리는 어떻게 커갔던 걸까? 발의 크기가 커지듯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는 저마다의 2층을 만들어 갔을까?
⠀
2.
내 좋지 않은 습성 중 하나는 쉽게 그리움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내가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순간들을 구슬처럼 모았다. 나 지금을 그리워하겠구나, 하는 기분이 들면 그 순간이 남몰래 더없이 소중해졌다. 그리움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즐기던 날은 동주의 나이 때 정도까지였던 것 같다. 교복을 입던 시절의 나는 언젠가의 그리움을 벌써 그리워했다. 그때 그리움이란, 현재에서 과거를 향하는 일방향의 감정이 아니라 양방향의 교감이었다. 이제는 세상 도처에 별처럼 널린 감정의 뭉치들이 보인다. 그럼 지구에 숨겨진 그리움의 합은 지구의 부피보다 커다랄 거란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미래를 소급받아 느끼던 그 감정들이 너무 불어나버리면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지금은 안다.
영화 마지막, 텅 빈 양옥집의 단면을 보여주는 네 개의 숏 중 세 번째 숏이 가슴에 남았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위에서 찍은 하이 앵글숏. 영화는 옥주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할아버지가 튼 음악을 듣던 그 자리를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 숏은 그날의 옥주를 향하는 영화적 시선이었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미래의 옥주로부터 전해든 그리움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그곳에서 범람했던 새벽의 선율이 다시 엔딩 크레딧과 함께 밀려들 때, 그 음악이 꼭 옥주의 회상 아래로 흐르는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시간의 결이 한 데 섞여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르는 기분. 옥주야, 너는 그날 무슨 생각을 했니. 할아버지의 그리움이 너에게로 전이되었을 때, 너는 그 그리움과 너의 그리움이 하나로 섞이는 경험을 했을까. 네가 앉아있던 시공간의 좌표에는 어떤 그리움이 오랜 세월처럼 고이게 될까.
3.
양옥집에 들어온 옥주네와 할아버지가 저녁으로 콩국수를 먹는다. 그때 할아버지의 동의를 이미 받아놨다던 아빠가 우리 핑계를 대며 어색하게 뒤늦은 허락을 구한다. 옥주는 어이가 없다. 그런데 그때, 할아버지가 대답을 한다. "응, 그렇게 해." 그 말에 옥주는 깜짝 놀란다. 할아버지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의 끝에 있는 듯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무기력한 육체의 기운이 그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감정의 존재를 잊게 할 만큼 압도적일 때가 있다. 그런 육체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생생한 영혼의 감각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 옥주는 그 대답에서 할아버지도 모두 알고 있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변명하듯 늘어놓는 아빠의 말에 든 떳떳하지 못한 우리 가족의 사정이나 자기가 콩국수를 틱틱 깨작거리며 먹고 있던 이유까지. 이후 옥주는 할아버지를 알아간다. 할아버지는 웃을 줄 아는 사람, 아마도 따뜻한 사람. 어떤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 할아버지의 사진첩을 보며 옥주가 체화해 갔던 타인을 상상하는 법은, 언제나 부정해왔던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장례식 이후 밥을 먹다 옥주가 눈물을 터뜨리던 순간 빈 소파로의 점프컷은 옥주가 처음으로 목격했고, 받아들인 타인의 부재였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보고 싶은 그 마음.
과거의 더께가 앉은 양옥집에서 옥주는 그것을 배워갔지만, 영화가 옥주의 시선을 경유하여 그 과정을 체험시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리하여 섬세한 시선을 갖게 된 제삼자의 눈으로 이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고모가 양옥집에 들어와 남매에게 달려갈 때, 그 뒤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어색한 몸짓이 있다. 고모와 고모부가 싸울 때 옥주는 멀리 2층에서 그 싸움을 지켜보다 1층으로 내려와 거실로 나온 할아버지를 방에 데리고 들어간다. 옥주는 곧 고모와 아빠의 대화를 엿듣는다. 생일파티 날, 동주가 춤을 추는 동안 표정이 굳은 옥주가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종종 그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양옥집의 시선을 몇 초간 프레임에 둔다. 영화는 각각의 상황마다 거기에 가장 어울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혹은 그 상황을 가장 이질적인 밀도로 경험한 누군가를 남겨두고, 그곳에 놓인 풍경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양옥집에서 맞는 첫날 밤, 동주는 누나에게서 쫓겨나고 할아버지 방에서도 나온 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으로 가 침대 구석에 간신히 누운다. 그마저도 편치 않았는지 동주는 담요와 인형을 들고 방을 나간다. 창 밖으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날 동주는 어디서 잠을 잤을까? 영화가 끝나고 이 사소한 질문이 남았던 이유는 그 밤을 동주가 기억할 것 같아서, 다른 가족들보다 훨씬 더 진하게 기억할 것 같아서였다. 이 영화가 보편의 경험을 반추하게 만드는 힘은 이 밤을 동주로 묘사하는 그런 선택에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그것을 겪은 경험은 모두에게 서로 다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니 보편의 경험이라는 말은 실은 허구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들이 무엇보다 내밀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남았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기에 이 영화는 보편적이다. 꺽꺽 우는 옥주의 울음은 정말 그렇게 울어본 사람만 만져볼 수 있는 무엇이다. 나를 모르면서도 나를 이해해주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렇게 다가온 영화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