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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Apr 02. 2022

그러니 노래를 부를 수밖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산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다. 마지막 기차였고 열차 안은 조용했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조그맣게 말을 건네셨다. 친구 만나고 오냐고, 학생이냐고, 이렇게 늦게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진 않냐고. 그렇게 잠시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떼셨다. 나만한 아들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만한 아이를 보면 항상 아들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부모는 땅에 묻어도 자식은 가슴에 묻는 거라고도 하셨다. 나는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했고 아주머니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단출하게 표현하자면-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며 서서히 고개를 돌리셨다. 곧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아주머니는 먼저 목적지에서 내렸고, 기차는 다시 찾아온 고요를 실은 채 개의치 않고 내달렸다.


<걸어도 걸어도>를 보다가 이 당시의 기억이 난 것은, 극 중 료타(아베 히로시)의 어머니이자 준페이의 어머니인 토시코로 분한 키키 키린의 표정 때문이었다. 요시오 군을 이제 집에 부르지 말자는 료타의 말에 대답하는 그에게서, 집에 들어온 나비를 준페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드문드문 스쳤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고작 반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찰나의 표정엔 꽤 많은 게 담겨있었던 것 같다. 단순한 그리움이나 씁쓸함이 아닌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그 복잡한 표정에 엉켜있었다는 느낌. 어떤 말 할 수 없는 감정을 홀로 간직하며 살아가실까 아주머니는.


"숨어서 듣는 노래 하나쯤 누구나 있기 마련이에요." 유카리(나츠카와 유이)는 말했다. 그 말은 곧 누구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있다는 뜻일 테다. 남편의 외도를 혼자만 새겨둔 채로, 요시오 군에 대한 방향 없는 증오를 묻어둔 채로, 또 이 영화에 나오지 않은 수많은 마음을 닫아둔 채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더욱 복잡해지고 아이러니 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대부분 끝까지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있다. 어릴 때 짝사랑하던 감정을 혼자만 고이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형만을 챙기던 아버지에게 깊은 균열을 가지고도, 자신과 아들은 아직 가족 대접을 해주지 않는 어머님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료타와 유카리는 그들을 보러 가야 한다. 가족 관계에서 과거란 현재의 수식어로만 자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쌓이고 쌓인 과거의 상처들은 아물지도 못한 채 현재 그 자체의 주요 문장 요소가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뒤틀릴 수밖에 없는 관계가 때때로 그 민낯을 슬쩍 보여줄 때 우리가 내심 당황하고 마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족이란 그저 덮고 살아가야 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영화를 보며 '있을 때 잘해야지'라고 생각한들, 우리네 각각의 가족들은 티 없이 간결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잘할 수 없는 영역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있을 때 잘해야지 라는 생각을 있을 때 잘하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며 한다는 것은 괜스레 미안해지는 일. 곧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되려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선으로 연결된 이들에게 '잘하라'는 말이 아닌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직 잘할 수 있는' 가족이 남아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젠 잘할 수 없는', 곧 세상을 떠난 가족을 가진 이들에게도 충분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걸어도 걸어도>는 이미 죽은 이의 무덤을 찾아가 물로 더위를 식혀주는 것처럼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 구성원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내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이 영화를 죽은 부모를 생각하며 만든 영화라고 했으니, 그에게도 이 영화는 '보내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서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혹여 그의 이런 시도가 '꼭 한 발씩 늦은' 뒤척임이 되더라도, 이 작품은 그에게 가족을 기리고 보내주는데 정말 커다란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은 너무 고되고 아프고 지난했겠지만.


물론 그럼에도 남아있는 가족을 향한 연민은 존재한다.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관계라 하더라도, 이 영화는 그렇게 걸어가는 모습 자체를 따뜻한 눈으로 포착하고 있다. 아직 어떤 실도 엉키지 않은 아이들이 같이 놀던 장면이 기억난다. 벚꽃을 향해 아이들이 쭉 뻗은 손이 서로 맞닿는 실로 찬연한 모습. 언젠가 조금 어색해지고, 불편해질 수도 있는 저 아이들의 현재 모습을 이렇게 이질적으로 넣어둔 감독은 여전히 투명하고 순수한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옥수수튀김을 먹는 장면이나, 딸과 함께 요리하는 엄마처럼 여전히 식지 않은 가족의 일부 단면을 보여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제 아이가 둘이 된 료타네가 천천히 차를 타고 그들처럼 살고 있을 많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엔딩은, 정말 그렇게 걸어가고 있을 뿐인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는지.


소실점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지만 무한정 늘어나지 않는 인생의 캔버스는 어느 순간 우리에게 시간의 절벽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 막막한 길 위에서 우리는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가닿을 수 없었을 저 부유하는 좌표와 소실된 소실점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걸어온 길을 돌이켜본다면, 꽤나 잘 헤쳐온 길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봄이면 노란색으로 옷을 바꿔 입고 또 다시 시간을 타고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이토록 지독한, 편지와 일기가 뒤섞인 영화.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엔 이 영화 역시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다. (2018)



사람이 문장이라면, 그것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을 것이다
평생에 걸쳐 수정되고 수정된 너덜너덜한 문장을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신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모른 체할 수 없다면, 손 끝으로 조금씩 읽어내자

모르겠다고 낙담하지는 말자
마침내 그 알 수 없는 문장에 운율을 입히고 멜로디를 붙일 수 있을 때까지

그럼 언젠가 시처럼, 노래처럼 그 사람을 머금고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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