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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y 08. 2022

기꺼이 살아가고 있을 무용한 풍경들

권민표/서한솔, <종착역>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2018년, 제대하고 친구랑 제주도를 갔다 온 적이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길게 떠난 여행이었다. 그때 일회용 카메라를 몇 개 가져갔었다. 카메라를 사고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그거라도 몇 개 사간 거다. 다행히 가져간 건 전부 찍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나서 따로 현상을 맡기지는 못했는데, 왜냐면 그때의 제주는 왠지 필름 속에 있는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 일리는 당연히 없고, 그냥 어쩌다 보니 시간이 지났다. (지금도 저기 본가 서랍 어디에 처박혀 있을 텐데..)


그래서 <종착역>을 보면서 아차 싶었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우리가 가져갔던 거랑 똑같은 일회용 카메라 들고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내 현상하지 않은 사진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뭔가 찔리기도 했고.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보는데 마음이 계속 이상해졌다. 그때 제주도 이곳저곳을 찍었던, 그러니까 아직 어떻게 찍었는지 확인도 못 해본 그 몇 년 전의 사진들은 지금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정말 그걸 현상하지 않는다면, 혹은 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현상이 불가능하기라도 하다면 그 사진들은 그저 그렇게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걸까?


<종착역>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영화의 종착역은 시연이 다른 친구들이 모두 잠든 파란 아침에 마을 회관 입구를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재밌게도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시연이 찍은 사진은 영화라는 '세상의 끝을 찍은 사진'이 되었다.) 그전에 드르륵드르륵 필름을 감으며 시연이 연신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때 나는 시연이 찍고 있는 사진들이 영화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진들만큼은 시연이 오롯이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다 같이 있을 때 찍은 다른 사진들과 달리, 저 사진들은 오직 시연이만 알고 있는 비밀로 남겨질 것이기에. 하지만 영화는 시연의 사진 하나를 화면에 불러낸다. 이 선택이 못내 아쉬웠다. 그 자리가 바로 내가 현상하지 않은 사진들이 몰래 살고 있어야 할 공간처럼 느껴져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그 사진에 오래 붙들릴 수밖에 없었지만.


필름 카메라를 제대로 가져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다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겠지만) 필름 카메라는 그 자체로 간격을 찍는 기계가 아닐까.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필름에 빛의 흔적을 그려낼 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시간과 그걸 현상해 확인하는 시간 사이의 거리마저 동시에 예비하는 기계. 그러니 필카가 찍는 것은 '사이'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카를 찍는 감각은 과거를 불러내고자 하는 그리움의 메커니즘과도 닮았다. 그리움이란 언제나 3차원의 빈틈 안에서 작동하는 감정이니까.


<종착역>이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화면에 불러내며 일으키는 시간성이란 정말 뭉클한 것이었다. 우선 말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을 찍고 있는 영화의 카메라다. <종착역>의 카메라는 아이들의 여정에 단지 동행할 뿐, 동참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 핸드 헬드나 트래킹으로 찍힌 숏은 없다. 클로즈업 역시 부재한다. 카메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아이들을 담아낸다. 마치 직접 아이들 속에 들어가 여행을 함께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아이들이 찍은 사진이 화면에 직접 등장할 때, 순식간에 영화가 아이들과 두고 있던 거리가 좁혀진다. 그건 너무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사진을 찍는 이의 입장이 되었다기보다는, 그 사진을 언젠가 다시 꺼내보는 미래의 입장이 된 것 같았다. 영화의 시간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종착역>은 그렇게 아이들을 담고 있는 영화의 시선과 아이들이 찍고 있는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을 다시 들춰보게 될 언젠가의 시간까지 중첩된 신비로운 시간성을 펼쳐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보여주지는 못한다. 한 공간에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어도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그중 하나의 사진일 뿐이다. 물론 이건 아주 경제적인 선택일 테다. 그런데 그 선택이 영화 안에 조그만 공간들을 마련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테면 이런 장면. 신창역에 처음 도착한 아이들이 허무함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그들은 "뭐라도 찍자"는 말과 함께 다 같이 일회용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이때 네 아이는 모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찰나의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 영화의 외화면이 단번에 넓어졌다. 네 개의 필름 안에 네 개의 장면이 새겨졌다는 명징한 사실. 그 정확한 대응이 곧 우리의 그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가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사진들은 앞서 언급한 영화의 시간성과도 아름답게 결합하여 무수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 그만의 것으로 남겨졌던 모든 풍경들이 기꺼이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찍는 순간 미래에 도착해 있었을 그때 제주도의 여러 풍경들도). 현상되지 못할지라도, 화면에 소환되지 않을지라도, 심지어 기억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2.


영화를 10분만 보고 있어도 이 대화들은 결코 짜인 시나리오일 수 없다는 걸 누구나 느낄 거다. 아이들은 별다른 목적도 일관된 흐름도 없이 되는 대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90%가 보통 그런 것처럼. 두 감독은 네 배우들과 사전 만남을 가지면서 당초 써두었던 시나리오가 14살 주인공들의 솔직한 대화를 담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네 친구들끼리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준 뒤 최대한 자연스러운 대화를 반영해 영화에 담아냈다고. 그렇게 러닝타임을 꽉 채운 리얼한 대화들은 그 자체로도 너무 재밌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이 대화들이 가지고 있는 무용함이라는 성질이다.


'종착역'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계속해서 주인공들의 여정에 목적을 부여한다. 이들의 행선지는 '세상의 끝을 찍는 것 > 신창역에 가는 것 > 구신창역에 가는 것 > 소정의 핸드폰을 찾는 것 > 다시 신창역에 돌아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세팅값이 무색하게도 친구들은 그러한 목적 사이사이마다 여분의 시간을 생성한다. 고양이를 따라간다거나, 비를 맞으며 논다거나, 그냥 달린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하며. 시간은 지연되고 목적지는 지워진다. 결국 '종착역으로의 여정'에서 '종착역에서의 여행'으로 탈바꿈하는 영화. 주인공들의 대화는 그렇게 무용함으로 가득 차버리는 순간들을 가장 자연스럽게 기입하는 방식이 된다.


이러한 종착역의 현실성이 내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말하고 싶다. 원래 나는 성장 영화를 좋아했다.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 전과는 조금 자라난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영화.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나 역시 영화의 러닝타임이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는, 나 역시 주인공처럼 무언가 성장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감정을 단지 착각이라고 표현하는 건 가혹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요즘의 나는 기껏해야 두 시간 남짓한 영화에게 대단히 많은 걸 기대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중이다. 내게 <종착역>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그저 흘러가버렸다는 당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무언가 달라지지도, 나를 변화시키지도,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영화는 하릴없이 지나갔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 정말 오랜만에 조급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감정이었다. 보는 내내 한없이 충만했다. 지금 내가 이 영화를 본다는 게 도피와 휴가와 산책의 시간임을 <종착역>은 기쁘게 인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조금 더 이야기해야겠다. 영화는 아이들의 대화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안에서 무언가가 피어날 것임을 믿고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우선 전학생인 시연이 다른 친구들과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사진 동아리에 들어온 시연이 세 친구가 있는 교실로 들어온다. 시연은 자기소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송희의 렌즈를 함께 찾아주며 간단히 이들의 친구가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리지 않고도 단지 상황에 '동참'하는 것만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관계는 딱 저 시절에만 가능한 일. 그건 영화의 카메라는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연은 세 친구 중 특히 소정과 조금 더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집에 가는 방향이 다르고,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적은 시연은 나머지 세 친구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집과 반대 방향이지만 친구들과 조금 더 걸어가거나, 팔찌를 받거나, 진실게임 중 대화에 애써 끼어드는 시연의 모습 등을 통해 영화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함의 이면을 세심히 관찰한다.


별 다른 전사 없이도 시연의 감정을 멀리서 다독이던 영화는, 깊은 밤 마을회관에서 이뤄진 대화를 통해 그의 감정을 조금 더 드러낸다. 꼬박 하루 동안 쌓여갔던 아이들 사이의 밀도는 이 밤을 조금 더 깊은 감정을 내어보일 수 있는 장으로 만든다. (두 감독은 실제로 마을회관 씬을 찍을 때 전보다 훨씬 더 적은 테이크로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시연은 소정에게 이렇게 누구랑 빠르게 친해진 건 처음이라는 조금은 낯간지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두 친구는 세 명의 무리에서 혼자가 되던 과거의 경험을 공유한다. 한 편 송희와 연우는 초등학교 때와는 달라진 다른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중학교 올라오니 곤충 잡는 애들도 없어지고 애들이 다 비슷비슷해지는 거 같다고. 하지만 그런 얘기 역시 너희가 중학생이 되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너네는 모르겠지.


곧이어 한 자리에 모인 네 친구는 자연스레 서로의 조금 더 깊은 마음을 꺼내놓는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 났던 부모님 생각은 자연스레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한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시연의 고백으로 시작된 대화에서 네 아이는 앞다투어 조부모에 얽힌 각자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아이들은 상대가 가진 아픔에 공감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위로해주려는 시도를 하기에는 아직 서툴다(사실 이것에 서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만 처음으로 내 속 깊은 감정을 말하는 일과 그런 친구의 말에 나 역시 말하지 못했던 사연을 서둘러 내어놓는 일은 아주 놀라운 경험으로 우리에게 박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최초의 감정은 이후 우리 삶을 지지해주는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네 할아버지도 현충원에 계시냐며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는 시연의 호들갑은 정말 저 시절의 대화이기에 유독 빛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영화가 찍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을 목격하리라는, 이런 대화에서는 뭐라도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믿음이다. 영화는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든다. 그게 너무 좋다. 대화 안에서 벌어지는 작고 사소한 기적을 마땅히 기다리는 영화라서. 무용한 대화가 무심코 마음 안쪽을 건드리는 순간은, 무용한 시간이 자기도 모르게 관계 안에 쌓아낸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것. 그런 주고받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던 내게 <종착역>은 정말 꽉 안아주고 싶은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3.


Q : 모험 서사에 여자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독특하다


서 : 저희가 촬영 전에 학생들을 다수 인터뷰했다. 남자아이들은 여가시간에 게임 아니면 축구를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은 하는 게 거의 없다고 답하더라. 해봐야 공원에서 틱톡을 찍는다,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정도였다. 한국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처럼 특정한 공간(PC방이나 운동장)을 점유한 게 아니라 놀 공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이 친구들에게 과제가 주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겠다고 봤다.


권 :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자아이들은 활동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등장한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활동적이지 않고 대화만 많은 이미지다. 여자아이들이 활동성 있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 흥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 키노라이츠 매거진 인터뷰 발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오롯이 네 여자아이들을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주변부 인물로 잠깐씩 등장하는 선생님, 행인, 할머니 등은 이들의 여정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여기서 신창역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할머니는 대놓고 카메라를 쳐다보기도 하는 비연기자처럼 보이는데, 그가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 덕분에 두 감독은 할머니의 시선과 말을 편집하지 않고 남겨두었을 것이다). <종착역>에는 주인공들의 세계만 존재한다. 영화에서 갑자기 밤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네 아이가 다시 신창역으로 가기 위해 시골길을 걸어갈 때 관객이 외부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원경에서 담으며 가슴이 철렁하던 밤길마저 개에게서 도망치며 웃는 아이들의 놀이 공간으로 채워낸다. 여자아이들 서사라면 으레 있을 법한 위험해 보이는 (남자) 어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험을 억지로 제거해버린 게 아니라 이 세계 자체를 옹호해주는 시선으로 느껴졌다.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 마을회관은 그런 영화의 마음을 그대로 체화한 공간이기도 했다. <종착역>의 활달하고 안온한 세계를 마음껏 지지하고 싶었다. (2022.04)



*출처: https://magazine.kinoligh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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