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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Oct 07. 2020

퀸스타운에 냄비를 두고 왔다.

* Day 13 / 20201006 화요일

@Te Anau


테 아나우로 가는 길목 Lumsden에 있는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일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남섬 일부 지역에 강한 바람 주의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직격 타를 맞은 현장에서 우리는 차박을 했다. 일어나 보니 우리 캠퍼밴 옆으로 전 날 밤 보던 것보다 많은 차 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도 바람을 덜 맞기 위한 장소로 다들 피신해 온 거겠지.


어제 도착해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준비하는 데, 냄비가 보이지 않았다. 렌터카 업체에서 제공해 준 냄비였다. 백팩커스에서 체크 아웃하기 전에 남은 쌀을 넣고 불려 두기 위해 부엌으로 잠깐 가져갔었는데.. 그 이후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백팩커스에 전화를 했는데 친절하지만 사뭇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의 매니저는 스태프들에게 문자를 돌려 보고 회답이 오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여행 중 꼼꼼한 남편과 다르게 계속 하나씩 빠뜨리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 사건을 잠잠히 지켜보고만 있는 남편에게도 이유 없이 화가 났다. 게다가 바람이 하도 불어대서 밖에서 식사 준비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좁은 캠퍼밴 안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입을 닫았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오히려 바보같이 해맑게 웃으며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즐기자고 한다. 그런 남편을 보며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어 넘기기로 한다. 냄비 가지러 퀸스타운으로 다시 가기엔 시간과 기름값과 우리의 에너지가 너무 아깝다.  

캠핑용 냄비에 카레를 끓여 먹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대만 친구 호호에게 연락이 왔다. 밀포드 크루즈를 같이 타자고 했다. 퀸즈타운에서 하루 더 머무르는 그 친구에게 냄비 하소연을 했다. 친구는 본인이 가서 찾아보겠다고 하며 팔을 걷어 부쳤다. 고마웠다. 어쨌든 우리가 또 만날 명분이 생겼다.


오늘 결국 친구가 퀸즈타운에서 귀한 냄비님을 가지고 오셨다. 그 안에 불려 놓은 쌀은 없었지만, 차에 남겨진 냄비 뚜껑과 찰떡인 게 바로 우리 냄비였다. 그리고 그 친구들의 즉석 제안으로 우리는 그 커플과 함께 테 아나우에 있는 홀리데이 파크에 한 방에서 이틀을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들이 예약한 홀리데이파크에서 4인실을 저렴하게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딱히 계획이 없던 우리도 이 친구들과 함께 편안하게 테 아나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그 냄비 안에 닭볶음탕을 끓였다.

치즈닭볶음탕!


오늘 다시 한번 느꼈다.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여행자 보험도 있는 거겠지. 쌀을 불려 놓기 위한 냄비를 퀸스타운에 두고 왔고 그 냄비를 가지고 친구들이 이 곳으로 왔다. 불쑥 일어나 버린  실수와 사건을 통해 인연이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이 친구들과 조금 더 남섬 아래 마을을 즐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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