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병명이 붙던 순간

by 플로쌤

아버지는 늘 기압계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만으로도 집 안 공기가 변했다. 바깥의 공기가 천천히 스며들어오듯, 아버지의 존재는 그렇게 집안 전체를 점령했다.
“신발 정리 좀 하라고 했지.”
첫마디는 언제나 꾸지람이었고, 저녁 식탁에 앉는 순간부터는 전시 상황 같았다. 그땐 몰랐지만, 우리 집은 늘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숟가락을 들고 있는 손이 자주 떨렸다. 어머니의 반찬에 흠을 잡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몸 안 어딘가가 뻣뻣하게 굳어들어 갔다.
두 분이 함께 웃는 장면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기억의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속엔 이상한 공식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내가 완벽해지면, 이 집에도 평화가 올 거야.’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가련한 착각이었는지.

그때부터 나는 소리를 지우는 연습을 했다.
말을 줄이고, 움직임을 줄이고, 기척마저 사라지도록. 아버지가 있는 집 안에서 나는 거의 투명인간처럼 지냈다.
TV는 아버지가 없을 때만 볼 수 있었고, 내 방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은 아버지의 기분이 조금 괜찮아 보일 때뿐이었다.
시험 성적표를 받을 날이면 손끝이 얼어붙었다. 90점이 안 되면 안 된다는 강박이 그 무렵엔 이미 내 몸의 구조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종종 나를 꼭 껴안고 속삭이셨다. “미안해, 엄마가 부족해서 그래.”
그 말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위로라기보단, 어머니마저 내가 지켜야 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중학생이 되면서 완벽주의는 더 뿌리를 내렸다.
실수는 죄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은 숨 쉬는 일보다 먼저 떠올려야 할 일이 되었다.
“착한 아이”, “모범생”이라는 말들이 교실을 따라다녔지만, 정작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교실 끝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 아이들은 어떻게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 번쯤은 큰 소리로 웃어보고 싶었고, 선생님께 따지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나쁜 아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또 죄책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적, 친구, 말하지 못한 감정들.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위는 점점 망가졌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위를 절제하는 수술까지 받았다.
누구도 내 마음이 그렇게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 몰랐다. 나조차 몰랐으니까.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처음으로 정신과 진료실 문을 열었다.
30분 넘게 검사를 하고 상담을 한 후 내린 병명은 우울증, 좀 더 정확한 포현으론
“불안장애를 동반한 우울 에피소드.”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그저 ‘이제야 이름이 생겼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고통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름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진짜 고통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