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나만의 공간을 가꾸고 싶어 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오래된 고택에서 느끼는 아늑함이 건물의 풍취에서 남기도 하지만 몇 그루의 나무에서 그 세월과 의미를 찾게 한다.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느끼는 그 아름다움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외국의 어느 정원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정렬된 공간에 각진 사물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기도한다. 자연을 가져다 놓고 인공으로 잘라 맞춘 그 아름다움은 자연을 그대로 살려 길을 만든 우리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경화의 멋도 동서양이라는 구분으로 본다면 접근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벗어나 집안으로 끌어들인 정원 속 풍경을 통해 서로가 바라보던 풍경을 느껴본다.
정원은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마음이 머무는 자리다. 자연은 늘 곁에 있지만 그 자연을 다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닮은 정원을 만든다. 그런 정원은 바깥의 공간이면서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내면의 공간이 된다. 정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르는 인간 내면의 외형적 모습이다.
서양의 정원은 규칙적인 공간 나눔, 분리의 질서 안에서 만들어진다. 짜인 규격 안에 규칙적으로 잘린 나무 가지와 정돈된 길, 계산된 시선의 흐름 속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길을 따라 배열된다. 곧 여기서의 자연이라는 것은 선택되고 배치된 인공의 자연물이다.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처럼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고 그 속에 빛을 찾아 작품을 했던 모네. 그는 이상과 상상 속의 정원을 현실 속에 재현해 내고 즐겼다. 그것은 오직 그만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정원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의 정원 속에는 이국적인 일본의 다리도 있고 연못도 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수련꽃이 피어난다. 자연을 디자인해 자신의 관점에서 조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정원, 1888》은 잘 정돈된 공간 속에 풍경을 강렬한 색채로 드러내 준다. 뜨거운 햇살이 사물을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한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의 감동적인 느낌이 담겨있다. 빼지도 더하지도 않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푸근함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옮겨놓은 듯 하지만 어느 일상의 하루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 공간 자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반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는 귀족의 사적인 화려한 정원 공간을 보여준다. 화려한 복장으로 그네를 타는 젊은 여인, 뒤에서 나이 든 이 가 줄을 당겨주고 있는데 여인의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발끝에서 이어지는 시선은 나뭇잎 사이의 젊은 남자로 은밀하게 연결된다. 흔들림 속에 슬쩍 벗겨 던진듯한 구두와 휘날리는 치마 바람은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화려한 정원은 은밀한 연애 장소가 되고 사랑이 머무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우리 정원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인 개방적인 공간이다. 그림 속에 많이 드러나는 산과 계곡 숲과 소나무, 정자 등은 자연과 하나 된 듯 머물러있다. 그 속에 동물도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일체화된 듯이 그 자리에 위치한다. 설치된 정자와 다리 같은 인공적인 것조차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바람의 흐름조차 막지 않는다. 그 속에 있는 사람조차 동화되어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곧, 정원은 채우는 곳이 아니라 비워지는 공간인 것이다. 서양의 정원이 소유의 개념이라면 동양은 이용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고 할 것이다.
정원은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인간이 닮는다. 누군가에게는 잘 정돈된 질서의 공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사랑과 욕망이 머무는 무대가 되며 또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자신을 비우는 자리로 남는다. 우리는 정원을 가꾸고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정원이 있어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원은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인간이 바라보는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가 정원의 중심이 되고 자연과 연결의 고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