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계의 귀인貴人, 세상을 떠나다.
환대받지 못했으나, 세상을 환대한 뮤지션 양병집
대중음악계의 귀인貴人, 세상을 떠나다.
사람은 태어난 이후 사회 속으로 들어서며 각자가 지닌 능력에 맞는 처우를 받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받는 대우와 대접이 같을 수는 없다. 서로를 맞이하고 마주한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며 최선의 삶을 살아간다. 여기 생전에 제대로 환대歡待받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 그의 본명은 ‘양준집’. ‘조지 양’으로도 불렸던 그는 한국 포크음악을 개척하고 다져냈던 뮤지션이자 음반제작자 양병집이다. 국내에서 소소하게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2013)>의 주인공은 히트를 기록한 유명 뮤지션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잊힌 양병집의 모습 같았다. 또한 수십 년이 흐른 이후 뒤늦게 대중에게 환영받고 자신의 길로 다시 돌아선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 2011)>의 주인공은 양병집이 바라마지 않던 꿈과 다름 아니었다. 양병집은 삶과 현실, 음악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하고 배려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 시대의 귀인이었다.
2021년 12월 24일 양병집은 지인과 자주 찾던 카페에서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고 연락마저 닿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지인들은 곧장 112에 신고를 했다. 홀로 생활한 지 이미 오래인 양병집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고인이 지인들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시점은 12월 23일이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발견되기 이틀 전, 그는 홀로 사투를 벌이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12월 28일 청담동 성당에 고인의 빈소가 마련되었다. 고인의 생전 삶을 잘 알고 있던 조문객들은 그의 마지막 호흡이 멈추던 순간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남다른 음악성과 감각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양병집
음악을 향한 양병집의 열정은 그 어느 풍파보다 두껍고 견고했다. 양병집의 음악은 높은 작품성과 지대한 영향력에 비해 명성이 낮은 편이다. 그를 소개하는데 제격일 수 있는 예는 김광석의 노래로 잘 알려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원작자라는 점이다. 한 가지 예를 더하자면 서유석이 불러서 히트를 기록한 <타박네>의 원작자라는 부분이다. 두 곡의 공통점은 양병집이라는 분모를 가지지만, 두 곡은 양병집이 온전히 창작해서 발표한 곡은 아니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양병집이 1974년 성음제작소에서 발표한 데뷔작 「넋두리」에 <역逆>이라는 제목으로 최초 수록했던 곡이다. 김광석은 1995년에 기획된 리메이크 앨범 「다시부르기 2」에서 양병집의 <역逆>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제목으로 수록해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 황해북도 연탄군의 민요로 알려진 <타박네>는 양병집이 채집해서 완성한 곡이다. 이 곡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표되는 과정을 거쳤다. <타박네>는 1972년 9월 서유석의 세 번째 독집 「I WANT TO SEE MY MOTHER」와 같은 해 11월 유니버살 레코드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음반 「맷돌(밝은노래모음)」에 수록되며 대중의 사랑을 이끌었다. 양병집이 가창한 버전은 1974년 대도레코드에서 제작된 컴필레이션 「GOLDEN FOLK ALBUM Vol. 4」에 수록된 게 처음이었고, 이후에도 양병집의 목소리와 여러 가수의 버전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대중음악사에 기록적인 히트와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와 ‘타박네’는 온전히 양병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비슷한 예는 또 있다. 김광석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히트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블루스 뮤지션 김목경을 세상에 알렸다.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격정 어린 삶을 살고 있는 한대수는 한국 포크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남겨졌다. 흡사한 평행선에서 전개된 양병집의 음악과 그의 인생은 그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얻어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양병집은 자신의 솔로 음반을 기획하고 발표한 것 외에 음반제작자로도 활동했다. 1981년 양병집은 자신이 운영하던 음악카페 ‘청개구리’에서 후배의 소개로 만난 동서남북의 음악에 심취하며 대중음악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명반 「N.E.W.S.」를 제작한다. 평가와 달리 이 앨범은 발매 당시에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또한 계약 직전에 엇갈려서 함께 하지 못했던 듀엣 해바라기는 양병집과의 인연으로 대중음악계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제작한 음반 가운데 그나마 성공을 거둔 뮤지션은 16년 차이와 손지연이다. 16년 차이는 고른 음악적 평가 속에서 히트 역시 크게 상승되고 있었지만 한 순간에 해체를 맞이했고, 한국의 조니 미첼Joni Mitchell로 불리는 손지연은 발매 당시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양병집과의 인연을 오래 끌지 못했다. 음반제작자로서도 남다른 감각과 추진력을 지녔던 양병집이었지만, 그가 기획한 음반들은 자신의 음악들처럼 시기를 잘못 만난 이유로 대중의 이목을 이끌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제작했던 밴드와 뮤지션들에 대한 평가가 뒤늦게나마 형성되고 융성했지만, 양병집에 대한 지분은 이미 사라지고 만 시점이었다.
‘서울 하늘 보고 싶어서 무조건 올라왔소.’(<서울 하늘1> 中)
‘음악이 하고 싶어서 너무 하고 싶어서 무조건 해왔소.’
서울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한 양제을과 김경패 부부는 딸 넷과 함께 전쟁을 피해서 부산에 터를 잡는다. 1951년 부산광역시 구포에서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양병집(본명 양준집), 그는 온화하고 풍요롭던 환경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포크 가수로 성장하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대구를 거쳐 수복된 서울로 돌아온 양병집은 회현동과 묵정동을 거쳐 청운동, 옥인동으로 이사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청운국민학교와 중앙중·고등학교에서 학업을 이수하고, 1969년 서라벌예대(現 중앙대학교) 음악과에 입학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양병집은 아버지를 따라 증권업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관련 업종에 적응한 이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오붓하게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직장을 다니기 직전에 양병집의 유일한 취미는 만돌린 연주였다. 어느 날 고교 시절 YMCA 합창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의 요청에 무대에서 처음으로 연주와 가창을 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참여하기 시작한 영어 모임에서 첫 번째 개인 리사이틀을 벌인 이후 양병집은 자신 안에서 오래도록 꿈틀대고 있었던 커다란 에너지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고. 대중음악가로 본격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세시봉과 함께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통하던 ‘내쉬빌’ 등에서 활동했고 방의경이 진행하던 CBS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세븐틴’에 출연하는 등 서서히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함께 활동했던 멤버의 권유로 밥 딜런Bob Dylan과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음악을 마주한 이후 양병집의 인생은 음악 안으로 보다 더 파고 들어가게 된다. 그는 본격적으로 미국 모던포크에 대해 연구하면서 포크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한 풍조에 빗대어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역逆>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부를 곡이 부족함을 느낀 양병집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 주던 <타복네>를 직접 악보화해서 자신의 레퍼토리에 추가했다.
1972년 월간팝송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포크 콘테스트’에 <역逆>으로 출전한 양병집은 3위에 입상하며 본격적으로 음반업계 관계자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이후 양병집은 동양방송 PD였던 이백천과 함께 모 음반사를 방문하게 된다. 양병집은 대화 도중 잠시 앞마당에 나와서 <타복네>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곁을 지나며 이 곡을 유심히 듣고 있던 서유석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 서유석은 준비하고 있던 후속 앨범에 <타복네>를 <타박네>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다. 자신의 앨범에 실으려고 준비하던 곡이 다른 음반에 수록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양병집은 대로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대중음악계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만다. <역逆>과 <타복네>를 통해 실력 있는 음악가로 평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방식과 다른 틀을 지닌 양병집의 곡을 원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특히 양병집이 운영하던 음악카페 OX에 거의 매일 찾아와서 곡을 달라며 설득하던 이연실에게 여러 곡을 제공했고, 이 앨범이 크게 히트한 것을 계기로 양병집은 자신의 첫 음반 「넋두리」를 제작하게 된다. 이전에 완성해 두었던 <잃어버린 전설>과 <역逆> 외에 우디 거스리와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 Mary, 피트 시거Pete Seeger 등의 곡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곡하고 가사를 입혀서 녹음을 마쳤다. 수록곡 가운데 어머니를 그리며 작곡한 <아가에게>는 유일한 창작곡이었다.
이 음반은 유신 정권이 기세를 떨치던 1974년 3월에 발표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발매 3개월도 되지 않은 시기에 「넋두리」는 김민기의 1집 등과 함께 판매와 방송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조소 어린 눈빛과 담배를 질끈 입에 문 양병집의 얼굴로 구성된 재킷, 사회의 부적절한 기운을 풍자한 가사 등 모든 내용물이 정권에 거슬렸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그의 가사는 1970년대 활동하던 학생 출신 가수나 순수 음악인들의 내용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지녔다. 이는 직장생활을 하며 바라본 세상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정서가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과 현실 속에서 번복되었던 양병집의 삶
양병집의 1집에서 눈에 띄는 곡은 <역逆>과 <잃어버린 전설>, <타복네> 외에 <서울 하늘1>이다. 이 곡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이촌향도의 움직임을 주제로 담고 있다. 우디 거스리의 <New York Town>에 양병집이 가사를 입힌 <서울 하늘1>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무작정 도시로 이동했지만, 인구와 산업의 지나친 과밀화에 의한 주택 부족, 교통 체증, 일자리 부족 등의 문제로 생활이 쉽지 않았던 당시의 실상을 노래했다. 기대와 다른 서울의 실체를 마주하며 ‘내 안경이 기절’할 정도로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고 꼬집은 양병집은 ‘두 번 다시 안올랍니다. 화려하고 복잡한 서울 하늘 밑으로’라고 노래했다. 결국 ‘노래나 불러보자’는 자조적인 어투로 <서울 하늘1>은 곡이 마무리된다.
<서울 하늘1>에 배인 곡조와 가사는 양병집의 삶과 매우 닮았다. 그는 20대 전반에 걸쳐 음악을 향한 꿈이 컸다. 하지만 한대수와 김민기, 이장희 등 주류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던 이들과 비교해서 그의 꿈은 뒤늦게 이루어졌고 번복되었으며 예상과 다른 결과로 침체를 반복했다. 어쩌면 양병집은 「넋두리」 음반을 통해 전설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석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는 데뷔 앨범 「넋두리」가 실패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직장 생활을 재개하며 경제적 안정이 곧 삶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서 끊임없이 꿈틀대는 꿈은 음악과 현실을 오갔던 양병집의 번복된 삶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갈등으로 번지고 닥쳤다.
양병집은 1978년 데뷔했던 정태춘과 이전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1986년 어느 날 정태춘은 자신의 친척이 운영하던 ‘도솔천’에 양병집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전유성과 김광한, 이정선, 허성욱, 하덕규, 전인권, 임지훈 등 평소 양병집과 인연이 깊었던 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떠나는 양병집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하기 위한 환송식이자 그를 위한 콘서트 자리였다. 이민 당시 그와 함께 길을 나선 아내는 서른한 살이었고, 두 딸은 각각 일곱 살, 다섯 살의 나이였다. 호주에서 생활한 13년여 동안 양병집은 몇몇 곳에서 노동을 했고, 뮤지컬 사업 실패 후에는 음식점까지 운영했다. 1999년 9월 양병집은 여행 가방 하나와 기타 한 대를 메고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공항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내려서 발을 디딘 곳은 합정동이었다. 그 지역은 1995년부터 새로운 대중음악의 흐름으로 각광받던 인디 신의 여러 밴드와 뮤지션들이 활동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음원과 바이닐(LP)이 대중에게 크게 주목받던 2010년 즘 양병집에게 <역逆>과 <소낙비>의 어문 저작권을 사겠다는 이가 찾아왔다. “밥 딜런의 곡을 번안했을 뿐인데, 무엇을 팔라는 말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날 양병집은 생소한 저작권이라 할 수 있는 어문 저작권을 양도해주는 대가로 곡당 100만 원을 받았다. 2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다시 양병집을 찾았다. 이번에는 <타복네>의 저작권을 300만 원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금전이 궁하던 때였지만 이 날 양병집은 <타복네>를 팔지 않았다. 노래의 값어치와 관계없이 양병집은 어릴 적부터 효자가 되라고 어머니가 불러주던 유산과 같은 그 노래의 소중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뒤늦은 환대가 필요한 아티스트, 양병집
양병집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곡과 음반들로 대중음악사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대중음악계의 유산과도 같은 그와의 이별에 제대로 된 안녕을 고했을까. 양병집은 그가 남긴 음악과 업적에 반감되는 인지도와 대접을 받았던 뮤지션이자 제작자였다. 2000년대에 이르러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초창기 한국 포크음악의 주역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던 양병집.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도 한 끼 식사와 월세를 해결하기 위해 혜화 지하철 역사에서 하모니카를 불며 하루 몇만 원을 수중에 넣어야 했던 양병집. 어느 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고인의 모습일까. 호흡이 끊기던 순간 그의 마지막 ‘넋두리’조차 들어주지 못했던 우리는 은연중에 그의 음악으로 환대받아 왔다. 양병집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그의 음악에 이제는 조금 더 귀 기울이며 늦은 환대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글/고종석
단행본 『신촌 우드스탁과 홍대 곱창전골』, 공저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신해철 다시 읽기』 등을 발간했다.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성가족부 청소년유해매체물 음악분야 심의분과위원, 음반산업발전특별위원회 간사, 알레스뮤직 이사로 재직 중이다. 또한 월간 재즈피플, 파라노이드, 웹 사이트 네이버, 멜론, 벅스 등에서 대중음악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 이 글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 담론의 축적을 표방하며 창간한 인문무크지 ‘아크(ARCH)’의 네 번째 주제는 ‘환대’ 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