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 레온(Leon)의 남과 여
나는 이 길을 내내 혼자 걸었다.
굳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애써 동행자를 만들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마을이나 숙소가 한정적이어서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눌 인연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조금 특별하게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잭, 토마스, 크리스티앙, 달리아는 순례길의 둘째 날 작은 마을에서 서로 처음 만났다.
나도 같은 마을에 머물렀지만 눈인사만 나눴다. 셋째 날 길 위에서 몇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주쳤고 같은 마을,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 워낙 아무것도 없는 작은 마을이고 식당도 하나뿐이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4명은 다들 20대의 유럽 출신이어서 서로 이야기가 잘 맞는 듯 보였다. 나는 그저 옆에서 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간혹 묻는 질문에 답하는 정도로 존재감 약하게 그들의 옆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무 정보 없이 그저 조금 일찍 출발하려고 짐을 챙기는 내게, 일출이 멋진 순례자길의 포인트 장소가 있다며 함께 가자고 제안해 주었다. 덕분에 깜깜한 새벽 플래시 불에 의지해 함께 언덕에 올라 일출을 보았다. 언덕을 내려와 잠시 같이 걷다가 젊음의 보폭은 따라잡기 힘들어 점점 그들과 멀어졌고, 신기하게 이후에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이후 적응되기 위한 고통(?)의 날들을 지나고 처음으로 34km를 걸은 일곱째 날 작은 마을의 숙소에서 다시 이들을 만났다. 토마스는 짧은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잭, 크리스티앙, 달리아만 있었다. 일주일째 버티고(?) 있음에 서로를 대견해하며 격려해 주었다. 다음날 길 위에서 다시 만나고, 휴식을 위한 바에서 서로의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달리아는 발에 물집이 너무 많이 생겨 있었다. 그래서 오늘 많이 못 가고 쉬기로 했고 잭이 함께 해 주기로 했다. 나와 크리스티앙은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거의 40km를 걸었다.
이후에 나보다 더 빨리, 멀리 걷는 크리스티앙과도 헤어졌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중간에 Y양과 P양을 만나 신기한 인연이 겹쳐 3일을 같은 숙소에 묵었지만 길 위에서는 항상 혼자였다. 그렇게 내 몸과 길에 적응하며 걸어 순례길 중 최고의 도시 레온을 이틀 앞두고 잭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달리아가 함께 있었다. (레온은 순례길 중 큰 대도시이기도 하고 전체 거리의 반을 넘어서 이제 300km만 남는 곳이어서 의미가 깊다.)
잭은 말이 조금 많았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먼저 다가갔다. 그래서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다시 만날 때 서로 무척 반가워했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걷기 힘들어했던 달리아와 지금까지 함께 있는 것은 조금 다른 친절함 같았다. 더구나 일반적인 속도보다 최소 2일은 빠르게 걸어온 속도를 보면 달리아 혼자서는 절대 이곳까지 못 올 거리였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날 도착한 마을의 숙소의 자리가 없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잭은 침대를 구했고, 달리아는 못 구했다. 나는 당연히 잭이 침대를 포기하고 달리아와 함께 다음 마을로 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잭은 이곳에 짐을 풀었고 달리아는 떠났다. 보름 동안 함께 했던 달리아를 쿨하게 보내는 잭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옆에 있는 이탈리아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날 길 위에서 잭을 만났을 때 옆에 이탈리아 아가씨가 있었다. 그동안 무리를 해 와서 이번에는 천천히 이틀에 걸쳐 레온에 가려던 내게, 잭은 오늘 하루 만에 가자며 꼬셨고, 셋이서 그 힘든 마지막 언덕까지 함께 하며 레온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는 내리막길에서 둘은 금방 사라졌고 나는 천천히 도시로 들어가 장을 보고 식사를 하고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갔다. 거기에는 달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눈치도 없이 잭도 여기에 묵냐고 물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순간 스쳐간 그녀의 표정으로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동네 구경을 하러 나섰다. 레온의 대성당 앞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쉬고 있는데 저 앞에 달리아가 나타났다. 잠시 후 반대쪽에서 잭이 나타났다. 그 공간 안에서 서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만 뒤에서 관찰자적 입장으로 둘을 다 볼 수 있었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둘을 부르려다가 급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샤워도 하고 휴식도 취해서 판단력이 잠시 정상에 돌아와 있었던 것 같았다.
'어제 헤어져서 오늘 못 만났으니 이곳의 랜드마크인 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한 걸까?'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이곳이 가장 유명한 곳이니 여기 있으면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온 걸까?'
'레온에 왔으니 대성당은 봐야지 하고 왔는데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불편할까?'
내 머릿속의 상상은 자꾸 부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어쨌든 해피엔드'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