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대회가 아닌 걸 알면서도...
열여덟번째날.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 중 마지막 대도시 레온을 떠난다. 본의 아니게 하루를 쉬었는데 이게 득인지 실인지 잘 모르겠다. 2주가 넘게 걸으며 손은 좀 부었지만 다리가 너무 멀쩡한 게 좋으면서도 왠지 폭탄 돌리기 하는 기분이라 불안했다. 좋을 때 최대한 많이 사용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시간을 고려해 일찍 출발했다. 간밤의 열기가 미세하게 남아 있는 도시의 텅 빈 거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간혹 누가 봐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만 가로등 불빛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레온에서 산티아고까지는 300km 정도 남는다. 순례길을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 길 위에 사람들이 없다. 원래 걷던 사람들도 잘 안 보인다. 초반에 보이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간 건지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첫날 피레네를 넘고 묵었던 그 큰 수도원이 꽉 찼었는데 이후에는 한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대부분의 마을은 그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도 없다. 그래도 마을에 가면 숙소에 사람들이 제법 있는 걸 보면 걷는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의 걷는 시간대가 안 맞는 것도 같다.
어쨌든 덕분에 혼자서 여유 있게 음악도 듣고, 흥얼거리고, 가끔 혼잣말도 해가며 길을 걸었다. 하루 쉰 다음날이어서 마치 처음 시작하는 기분으로 기운 넘치게 걸으려고 했지만 역시 두 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두 시간 지나면 등에는 돌덩이를 지고 발에는 모래주머니를 찬 느낌이 된다.
드디어 오늘의 쉬어갈 마을인 'Hospital de Orbigo'에 도착했다. 조금 더 갈 기운이 있지만 다음 마을은 마의 구간 10km 이상 떨어져 있어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돌로 만든 아주 멋지고 긴 다리를 한참을 건넛마을로 들어간다. 다만 바닥을 돌을 박아 만들어 놓아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힘들다.
예쁜 것도 힘듦 앞에서는 장사 없다. 30km를 넘게 걸었어도 일찍 출발하고 많이 안 쉬었더니 숙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도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걸은 건지? 아니면 어디서 출발한 건지? 빨리 걷기, 멀리 걷기 시합을 하러 온 게 아닌데 이럴 때마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것도 지금 컨디션이 좋으니 생기는 욕심이겠지.
숙소는 방에 침대가 많고 화장실이 불편하지만 깔끔하고 예쁜 그림들이 걸려 있어 분위기가 좋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뒤뜰에서 시원한 콜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순례길 위에서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열아홉번째날.
시작부터 마의 11km 구간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원래 첫 출발하면 2시간 이상 걷고 첫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중간에 마을이나 쉴 곳이 없어도 참을만하다. 다만 오늘 가야 할 곳이 멀어서 걱정이다.
어제 숙소에서 고도가 그려있는 지도를 보며 계산해 보았다. 레온에서 그 마을까지 3일에 걸쳐서 가면 알맞은 거리였다. 그런데 32km를 걸어버려서 남은 거리가 애매해져 버렸다. 이틀에 걸쳐 가자니 너무 짧고 하루에 가자니 멀었다. 일단은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출발한 시간 중에서 가장 일찍 출발했다. 보통은 주위를 구분할 수 있는 시간에 출발했고 간혹 어두울 때도 조금만 걸으면 주위가 환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한 시간을 걸어도 깜깜할 정도로 일찍 출발했다.
16km 지나 있는 'Astroga'라는 마을까지 최대한 빨리 가서 그곳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Astroga'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서 어제 산 빵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힘이 남아 있었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짧게 걸으면 하루 동안 걸을 수도 있는 거리를 남들 자는 시간에 미리 걷는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Astroga'라는 마을까지는 그럭저럭 의도한 대로 가긴 했는데 그 이후가 걱정이었다. 그곳에서 출발 한 사람들은 다들 쌩쌩해 보이는데 나는 그들을 따라가려니 자꾸 뒤로 처졌다.
생각해 보니 거리보다는 속도가 문제였다. 혹시 숙소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 빨리 걸은 게 화근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길 위에 많아지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이상하게 더 힘이 들었다. 또한 큰 언덕을 맞이하기 위해서 가는 길은 그 고난을 예견하듯 점점 험해졌다.
역시 무리한 게 표가 났다.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내가 원했던 숙소에 자리가 없었다. 2순위 숙소는 고민을 해보지 않아서 급하게 앱으로 검색을 하고 찾아갔다. 사람이 없어 원하는 침대를 차지하고 짐을 풀고 있으니 사람들이 속속 들어온다.
표정을 보니 다들 죽을 상이다.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비슷한 표정과 몸 상태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피곤에 절어있고, 허리나 다리는 다들 환자이다. 그런데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의 루틴은 다들 제각각이다. 책을 보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 잠을 청하는 사람, 바로 술판을 벌이는 사람.. 길 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루틴으로 재충전하며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은 마의 고개를 넘는 날인데 다리의 상태가 약간 이상하다. 아파서 못 걷는 상태는 아닌데 한쪽 다리가 뻐근하다. 35km를 넘게 걸은 날이 몇 번 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이 가장 힘들었다. 너무 일찍 시작해서 그런 건지, 너무 빨리 걸어서 그런 건지 아무튼 조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몸 상태라면 26~27일 정도에 완주를 계획했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변경해야 할 것도 같았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앱으로 일정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