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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Jul 25. 2023

순간을 믿어요 가 불러온 추억의 맛

이제는 거의 정기적이 되다시피한 회동을 갖는 조씨와 김씨가 (둘은 부부) 있다.


주로 영화, 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데, 얼마전 김씨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네 이발관' 이라는 그룹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으며 작가로도 활동하는 '이석원'의 산문집 '순간을 믿어요' 라는 책이었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에 선듯한 독특한 이 책을 보며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이 '나'를 떠올리게 했다며 추천한다고 했다.



나중에 서점에 가면 찾아봐야지 라고 생각하다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조카를 픽업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대여가 가능했다.




이제는 집중력이라는 근육도 나이에 따라 노쇠해져 (특히 집에서) 영화나 책을 한번에 보지 못하는데 이 책은 너무 쉽고 재밌게 술술 익혔다.


그리고 정말 내 이야기를 작가가 보고 쓴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ㅎㅎ

신나게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 순간 (집중력이 떨어져서가 아니고) 책을 덮고 컴퓨터 앞으로 갔다.

책의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내용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

.......

그런데 글쎄 이 집의 냉면 맛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무슨 이름난 평양냉면 전문점도 아닌 그저 동네 시장 안에 있는 작고 허름한 분식집 냉면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심 터 이십 미터도 아닌 백 미터 이상씩 줄을 서서 먹던 전설의 맛집 되시겠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즐겨 들렀는데 서점을 나서면 항상 그 집까지 걸어가 냉면 두 그릇을 먹지 않고서는 집에 가지 않을 정도였다면 짐작이 갈까.

............

............

우래옥이고 을지면옥이고 간에 세상에 견줄 다른 냉면이 없던, 아니 냉면을 떠나 내가 태어나서 먹은 모든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던, 그러나 어느 날 주인분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식당이 문을 닫은 열일곱 살 이후로 다시는 맛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냉면,


그 맛이 너무 그리워 내 나이 서 살에 인터넷이란 걸 처음 하게 됐을 때도 가장 먼저 초록색 검색창에 '즈므집'이라는 세 글자를 쳐 볼 정도였던,

............

............

도대체 이 집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길래 인터넷에 그 긴 세월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던 음식이, 이렇게 버젓이 이 작은 집 메뉴판에 있을 수가 있을까.

.............

이석원이야기산문집 '순간을 믿어요' 중에서

"


나에게도 그런 식당, 메뉴가 있었다.

어찌보면 너무 평범한 메뉴인 '김치찌개'이고 식당은 무려 '기사식당'이다.


'명문기사식당'


책의 주인공처럼 '먹는 순간 목숨과도 바꿀수 있다고' 생각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주인이 알아보는 단골집 하나도 없는 내가, 아마 혼자서 가장 많이 갔던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며 이곳을 소개해 주신 당시 팀장님도 매번 그곳에 가자는 나를 질려서 피하실 정도였고, 김치찌개에 들어 있는 고기가 단순 국물맛을 위한것이 아닌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곳이었고, 당시 그 어떤 무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그녀와 함께 갔다가,

'그거 알아요? 멋있는 곳을 데려가면 오빠고, 맛있는 곳을 데려가면 아저씨라고 한데요' 라고 돌려까기 식으로 나를 아저씨를 만들며 단계를 후퇴하게 만들었고, 1년간의 세계일주 후에 내 몸에 한식의 요구치가 가장 높았을때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식당의 유일한 메뉴는 '찌개'라고 부르기에는 '국'에 가까운 비주얼과 점도의 김치찌개였고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과 무말랭이가 전부였다.

그래서 주문도 그냥 몇명이 왔는지만 손가락으로 펴 보이면 될 정도로 심플한 식당이었다.

그러면 진짜 거짓말이 아니고 식사시간대에는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다 셋팅하기 전에 음식이 나왔던 그런 곳이었다.


그 식당이 십여년 전에 갑자기 문을 닫았다. 식당 앞에 한창 지하철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이제 지하철타고도 찾아오기 쉽겠다고 좋아했었는데 어느 순간 문을 닫았다. 인터넷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그순간은 나는 믿지 않았었다.


사정이 있어서 이 장소에서 하지 못할 뿐 당연히 다른 곳에서 다시 영업을 할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길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그 근처에 갈 일이 생기면 혹시나 하 미리 인터넷을 검색해 보곤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이제 포기를 했는데 '순간을 믿어요'라는 책을 보며 몇년만에 '혹시?' 라는 기대감에 다시 초록창에 검색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식당은 아니고, 그 식당과 똑같은 메뉴와 반찬과 시스템(?)을 사용하는 식당을 찾아냈다.

'똑다리 김치찌개'는 '뚝다리 김치찌개'로 바뀌고 '명문'은 '명품'으로 바뀌어 '명품기사식당'이 되었지만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음식의 비주얼은 똑같았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나에게 이런 희망을 준 김씨가 아닌 그녀의 남편 조씨에게 알렸다.

조씨는 당시, 그 국의 비주얼을 지닌 찌개를 먹으러 나와 가장 많이 함께 다닌 당사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사천리로 약속을 잡았다. 바로 다음날로.


D-day 당일 아침. 조씨에게 톡이 왔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나에게 살짝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가 인생의 모토 중 하나인 나였는데 문자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김치찌개 하나 먹으러 가면서 마음까지 다잡다니~~)

그렇다고 해도 뛰는 가슴 아니 뛰는 위장은 막을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예전처럼 무심한 간판이 우릴 반겼다.

막상 '똑다리'가 '뚝다리'로, '명문'이 '명품'으로 바뀐 글씨를 보니, 마치 원조집 찾아 갔다가 그 옆에 비슷한 이름의 다른 집 찾아간듯 기분이 살짝 묘했다.




식당 안은 심플했는데 생각보다 작았다.


식사시간대가 아니어서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이 정도의 테이블로 운영되는 걸 보면 피크시간에도 예전처럼 많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점은 맘에 들었다. 혹시 다음에도 찾아오려면 사람이 많지 않은게 좋으니까.


주문은 역시나 손가락 두개를 펴 보이며 '2명이요'로 끝냈다.



반찬은 예전과 동일하게 무말랭이와 콩나물이 작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

그리고 드디어,



실물을 영접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름은 찌개지만 국의 비주얼을 갖고 있고, 맛도 완전 국은 아니지만 찌개보다는 국에 가까운 맛이다.


나에게 김치찌개 안의 고기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그 고기도 여전했는데 오히려 더 커졌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의 작은 고기가 더 맘에 들었지만 고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걸 더 선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예전 똑다리는 먹는 방법이 식당 벽에 붙어 있었다.

콩나물을 찌개에 넣고 고기와 김치와 함께 잘게 잘라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줄때 항상 가위를 함께 준다.


그런데 이 집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이 집을 찾아 온 사람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듯 했다. 다른 테이블의 기사 아저씨도 열심히 가위질을 하고 계시는걸 보면...




그리고 밥도 무한 리필인데 본인이 직접 퍼 오는 시스템이다.

저 밥솥도 예전의 그 밥솥과 똑같은데 원래는 주변에 '밥 리필'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집은 먹는 방법도 리필 방법도 안 쓰여 있는걸 보니 일단 사장님이 식당의 번창(?)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닌것 같았다.

예전처럼 우리는 기본 한공기씩을 국 아니 찌개에 말고 다시 한공기를 퍼와서 반씩 더 말아서 먹었다.


처음 똑다리 김치찌개를 소개시켜 주신 날, 뚝배기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드신 팀장님이, 국물과 고기가 남겨져 있는 내 뚝배기를 보시고는,


'왜? 별로야?' 라고 물었을때,

'저는 원래 라면을 먹어도 면만 먹는데 이정도면 거의 최고의 식사에요' 라고 답했는데


오랜만에 온 이곳에서 조씨가 국물과 고기를 남긴 나를 보고,


'거봐 예전의 그맛이 아니지?' 라고 물었고,

'이정도면 나한테는 뚝배기까지 씹어먹은 셈이야'라고 답했다.


음식값은 9000원. 5천원인가 6천원에 먹기 시작했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친구가 계산을 하며 내 대신 슬쩍 물어봤다.


'여기 혹시 예전에 그~~'

'사장님이 달라요'


또 그거 물어보는거야? 라는 표정의 직원이 자동 응답기처럼 감정 없는 톤으로 빠르게 답했다.


문을 나서는데 조씨가 오는 길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피천득의 인연을 생각해 보라고, 아사꼬를 세번째는 안 만났어야 한다고, 잘 생각해 보라고'


솔직히 맛이 예전과 같은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직장 상사때문에 회사생활이 재밌을 수도 있다는걸 알게 해주셨던 팀장님과, 지금은 누구의 아내와 엄마가 되어 있을 그녀와, 혈기 왕성했던 그때의 나, 그리고 그때의 조씨와 우리를 떠오르게 해준 맛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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