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작열하는 6월의 스페인 남부 해안, 코스타 블랑카.
두 달간의 강렬했던 하드코어 트레킹을 마친 내 몸에 주는 보상으로 그곳으로의 짧은 휴양을 선택했다.
중간에 합류해서 짧지만 역시 강렬했던 일정을 소화했던 Jin이 챙겨 온 국제운전면허증 덕분에 우리는 매일 렌터카를 타고 해안을 드라이브했다.
여행의 마지막, 아쉬움을 뒤로한 채 렌터카를 반납하러 가는데 Jin이 내게 물었다.
Jin : "돌아가는 비행기나 한국에 가서 볼만한 넷플릭스 영화 좀 추천해 주세요"
그때 불쑥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추천할 때 꼭 언급하는 영화였지만, 오래되고 마이너한 영화여서 찾아보기가 힘든 영화였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넷플릭스에 올라온 걸 발견했었다.
나 : "오래된 영화인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 얼마 전에 보니 넷플릭스에 있더라고."
나 : "원더풀 라이프"
지금은 거장이 되어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일으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처음 알게 해 준 작품이다.
Jin : "어떤 내용이에요?"
나 : "천국으로 가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 잠시 거쳐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골라야 돼. 그러면 거기 직원들이 그 순간을 짧은 단편영화처럼 만들어줘. 그러면 이제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거야"
나 : "사람들이 생각할 때 보통 그런 행복했던 기억이란 게 결혼이라든가 취직이라든가 꽤 거창한 추억일 것 같잖아?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더라고"
Jin : "정님은 그런 기억이 있어요?"
나 : "있지.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생각해 봤었거든, 그런데 크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딱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어. 추억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은 순간의 기억이야. 신기한 건 처음 영화를 본 게 벌써 꽤 오래 전인데 아직까지도 그 순간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야"
Jin : "어떤 기억인데요?"
나 : "음... 중학교 시절 초여름의 어느 주말 아침이었던 것 같아.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거실에 누워 늦잠을 자고 있는데, 마당에 계시던 엄마가 갑자기 뛰어 들어오시더니 내 입에...."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언제나 그랬다.
이 영화를 떠올리고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 목이 메어왔다.
슬픈 기억도 아니고 행복한 기억인데도...
짧은 순간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눌렀다.
내 목소리 톤이 짧은 순간 잠깐 변했다는 걸 Jin이 눈치챘을까?
나 : "갑자기 들어오시더니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셨어. 잠이 덜 깨어 눈이 잘 떠지지도 않았는데도 그 달콤함이 너무 선명했어.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거든"
나 : "마당에 심어 놓은 무화과나무에서 나온 첫 열매를 내게 주셨던 거야. 실물도 한 번도 못 보고 성경책에서나 봤던 무화과의 그 달콤함과 그날의 공기, 날씨, 분위기가 주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
매년 연초가 되면 올해는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일상에서 당분간은 떠나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집돌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요즘 넷플릭스를 방황하다가 '원더풀 라이프'가 눈에 띄었다.
재생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지를 눌렀다.
그런 영화가 있다.
좋아하지만 다시 보기 어려운 영화.
이 영화가 그렇다.
어떤 영화는 핸드폰에 태블릿에 노트북에 항상 담아두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다시 보지만, 어떤 영화는 매번 중간에 멈추게 되는...
영화를 멈추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보는데,
문득 세상을 돌고 돌다 다시 돌아와 엄마 품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단편 영화가 드디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