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태어나서 처음 가는 외국 여행을 또 다른 여행 초보 회사 선배와 함께 미서부 자유여행으로 갔다.
심지어 공항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빌렸다. 믿는 건 가이드북과 종이 지도뿐이었다.
나는 외국인을 보면 입이 안 떨어지는 상태였고 선배는 장롱면허였다.
우리는 공항에 가기 전 영등포역에서 만났다.
여행하는 동안 차 안에서 당시 히트가요들을 마스터하고자 영등포 지하상가에서 '최신가요 히트송' 믹스 테이프를 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우여곡절 끝에 렌터카를 빌리고 차에 탄 순간 우리의 여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 차에는 카세트 테이프를 넣을 데크가 없었다.
라디오와 CD 플레어만 있는 차였다.
속사포 멘트가 난무하던 미서부의 라디오를 틀고 여행하던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짧은 여행 일정이지만 이왕 온 김에 많은 걸 보고 싶었던 우리는 차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라스베이거스를 떠나기 전 발견한 레코드점에서 여행에 맞는 CD를 찾았다.
'마마스 앤 파파스 (The Mamas & The Papas)'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이 있는 앨범이었다.
이후 우리는 그 앨범에서 '캘리포니아 드리밍'만 반복 재생하고 LA로 가는 황량한 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해안 도로에서 목청 높여 따라 불렀다. 마치 '델마와 루이스'처럼...
2009년 1월 남미의 파라과이 시우다드 델 에스테.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P와 나는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함께 떠났다.
오후에 타고 다음날이 돼야 도착하는 2층 버스의 맨 앞에서 우리는 이구아수 폭포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해피투게더'를 노트북으로 함께 보았다.
폭포를 보는 일 이외에는 할 일 없는 마을에서 우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라과이의 '시우다드 델 에스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다가 어느 시간 이후가 되면 개미 한 마리 구경하기 힘든 도깨비 마을 같은 그곳에서, 한국에서도 한 번도 못 만났던 전설 속의 인물 같은 욕쟁이 할머니를 만나 오랜만에 한식을 배불리 먹었고 이상한 버스 여행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서먹해졌고 택시의 양쪽 창가에 자리 잡았다.
택시가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인 다리 위로 올라섰을 때 P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였다.
당시에는 하림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노래도 그랬기에 신기했다. 이 노래를 알다니... 치안이 안 좋은 브라질 여행을 앞두고 불안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기, 낡은 택시 안의 그 노래는 내게 알 수 없는 뭉클함을 전해 주었다.
2009년 3월 쿠바 아바나(하바나).
스마트폰이 활성화된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며 여행하던 시기였지만 쿠바는 예외였다.
완전한 아날로그 여행을 해야 했던 쿠바는 그래서 두려움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멕시코에서 비행기 표를 구해서 날아간 쿠바는 첫날 숙소를 찾아가던 상황이 내 여행 인생에 가장 큰 위기였다.
그렇게 당시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아바나의 까피톨리오 인근 숙소에서 한국 여행자를 만났다.
함께 아바나의 이곳저곳을 누비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방파제인 말레꼰으로 향했다.
아바나 최고의 여행지이고 놀이터이자 데이트 장소인 그곳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말레콘 방파제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이팟의 플레이를 눌렀다.
옆에 앉아 바다 위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음악이 듣고 싶다며 이어폰 한쪽을 원했다.
그때 마침 나오던 노래는...
이정재와 전지현이 주연했던 영화 '시월애'의 OST인 김현철이 부른 'Must Say Goodbye'였다.
당연히 모를 줄 알았던 그녀가 갑자기 이 노래의 멜로디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 먼 쿠바의 말레꼰에서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신기했다.
그날 하늘이 붉게 물든 쿠바의 어느 바닷가에서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치는 소리를 반주 삼아 영화 시월애의 OST를 함께 흥얼거렸다.
2010년 8월 몽골 고비사막.
쿠바만큼이나 어려웠던 여행지 몽골에서 운이 좋게 한국인 투어 메이트들을 만났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고비사막을 가기 위한 투어를 신청했는데 마침 같은 기간 투어를 원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끼리만 팀을 꾸리기로 했다.
다들 제법 여행을 다녔지만 몽골은 그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곳이었다.
길도 없는 망망대해 아니 망망초원, 망망사막을 운전기사의 촉(?)에 의지한 체 일주일을 지내야 했다.
극한의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주 빠르게 끈끈해졌다.
도망갈 곳, 피할 곳, 개인행동 할 곳 하나 없는 뻥 뚫린 대지를 사막하나 보겠다는 일념으로 러시아산 승합차 푸르공과 몽골식 텐트 게르에서 일주일을 동고동락했다.
3일을 쉬지 않고 달려 드디어 만나게 된 고비사막.
거대한 사막의 장관이 우리를 감동케 했지만 사실 더 감동한 건 사막의 밤하늘이었다.
우리는 모포를 가지고 나와 모래 위에 깔고 그 위에 누웠다.
하늘은 온통 별로 뒤덮여 있었고 잠시만 방심해도 놓칠 만큼 쉴 새 없이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
아이폰에 담겨 있던 '루시드 폴'의 '보이나요'였다.
당시에 모래 위에 나란히 누워 별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생각과 느낌은 모두 달랐겠지만, 지금은 우리는 모두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으면 아마 그때 몽골의 사막의 밤이 떠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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