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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Apr 22. 2017

있다 없는 것과 계속 없는 것 - 길리 트라왕안

인도네시아 - 롬복 - 길리 트라왕안

여행지의 숙소를 정할 때 내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위치이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가고자 하는 지역을 선택하고 목록이 나타나면 바로 지도를 클릭한다. 공항과 기차역과 터미널의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그곳에서 주 활동 무대가 될 곳을 확인한다. 그리고 지도에 나타난 가까운 호텔부터 하나씩 클릭해 본다. 물론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이 낮인지 밤인지, 얼마나 머무는지, 다음 이동지역이 어디인지에 따라 변동이 있긴 하지만 최고의 우선순위는 항상 위치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현지인에게 받을 가장 큰 스트레스나 위협이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이라 생각하기에 최대한 그 위험의 빈도를 줄이기 위한 나만의 살 궁리이다.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이 발리보다 더 선호(?) 한다는 롬복에 딸린 작은 섬 길리 트라왕안의 숙소를 예약할 때도 위의 기준을 적용했다. 섬이 워낙 작아서 연료를 이용한 교통수단이 아예 없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짐을 들고 오래 이동하지 않기 위해 지도를 클릭했다. 다행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 공항도 기차역도 터미널도 아닌 선착장 하나였다. 아주 짧은 일정도 아니고,  혼자이고, 낯에는 하루 종일 다이빙을 할 예정이어서 리조트급은 필요 없었다. 선착장 근처 나름 큰 길가의 나름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6일 예약했다.

배에서 내려 핸드폰의 지도를 보며 찾아간 숙소는 예상대로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점심 즈음 도착하니 숙소의 1층인 식당이 사람들로 꽉 차서 정신없어 보였다. 꽤 유명한 식당 같았다. 매니저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잠시 기다리라며 웰컴 드링크를 권했다. 음료수를 마시는 동안 일하는 종업원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하며 지나갔고 여자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도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 이유를 알았다. 숙소 매니저로 보이는 친구가 심각한 얼굴로 오더니 방이 없다고 했다. 여러 가지 호텔 예약사이트에 등록해 놓았는데 한 곳에서 예약하면 다른 곳을 지워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는 것이다.

'근처의 다른 호텔을 잡아 줄게요. 거기 비용은 내가 다 부담하고 혹시 차액이 남으면 돌려주고 섬에 있는 동안 자전거를 무상으로 빌려 줄게요. 내일 방이 비면 옮겨줄게요'

차액 돌려주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자전거를 빌릴 계획이 없던, 그냥 걸어 다니려고 했던 내게 그 제안이 솔깃했다.

'일단 다른데 봅시다. 내일 꼭 옮겨줘야 돼요'

소개해준 숙소는 큰길에서 벗어나 한 블록 들어간 곳에 있어 조용했고 방도 나름 맘에 들었다. 이곳으로 결정을 하고 짐을 풀었다. 막상 짐을 풀고 나니 하루 있다 다시 짐을 싸는 게 귀찮아졌다. 자전거를 받으러 처음 예약한 곳에 간 김에 매니저에게 니들이 잘못한 거니 그냥 안 옮기겠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매니저가 먼저 운을 떼준다. 내일도 방이 안 날 것 같고 이틀 후에 나 방이 날것 같다고 한다. 나는 몹시 화난 척 자꾸 말을 바꾸는 것에 항의했고 그냥 다른 곳에 계속 머물겠다고 했다.

다음날 다이빙 강사에게 들은 말은 방을 안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디에 묵냐고 해서 처음 예약한 곳을 말하자 거기 유명한 식당이랑 야시장이 있어서 새벽까지 무척 시끄러운 곳이라고 했다. 새로운 숙소의 리셉션에서는 왜 숙박비를 안내냐고 나에게 묻는다. 어제 데려온 곳에서 해결하지 않았냐고 하자 자기는 받은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작은 섬에서 그리고 바로 근처인데도 서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그 숙소에 찾아가 매니저를 만났다.

'나 방 안 옮길 거니까 그냥 전액 환불해줘요'
'내일 방이 나니까 그때 옮기면 돼요'
'니들이 자꾸 말을 바꾸고 거짓말을 해서 못 믿겠다. 나는 그냥 돈 다 돌려줘라. 그래야 지금 숙소 비용도 낸다.'

나의 강력한 항의에 그는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다만 지금 돈이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지금의 숙소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돈을 받으면 주기로 했다. 자전거는 돈을 받으면 돌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길리 트라왕안에서의 나의 고정적 일과가 생겼다. 오전에 배 타고 나가 다이빙을 하고 점심을 먹고 그 식당 앞에 가서 떼인 돈 받으러 온 채권자가 되어 매니저들과 한바탕하고 오후에 다시 배 타고 나가 다이빙을 하고 저녁에 돈 받으러 다시 식당으로 출근을 했다.



새로 얻은 방은 크기도 괜찮았고 화장실도 그럭저럭 쓸만했다. 조용했고 같이 하는 식당도 맛이 있었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처음 짐을 풀 때는 몰랐는데 빌린 핑크색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돌고 와서 방에 들어가니 화장실 입구의 벽에 난 아주 작은 구멍으로 무언가가 나와 있었다. 검지 손가락만 한 길이의 지렁이 같기도 하고 쥐의 꼬리 같기도 한 불그스름한 것이었다. 벌레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러면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최대한 멀리에서 놈을 움직이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방을 다 뒤졌다. 마침 몸에 뿌리는 스프레이 방식의 모기 기피제가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분사를 시작했다. 놈이 움직인다. 쥐의 꼬리였으면 그 구멍 안으로 감추었을 텐데 자꾸 밖으로 나온다. 일단 쥐는 아니다. 내 핸드폰에 그런 사진이 있는 것조차 싫어서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약간 지렁이를 닮은 다리가 많고 털은 없는 붉은색의 징그러운 벌레였다.

스프레이를 이용해 놈의 진로를 바꿨다. 화장실로 들어가게 유도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드디어 샤워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사정없이 샤워기를 난사했다. 놈은 마지막 강도 높은 저항을 끝으로 하수 구멍으로 빠져들어갔다. 혹시 모를 기어오름을 방지하고자 한참을 물을 흘려내려 보냈다. 길었던 하루의 마지막도 강렬한 전투로 끝을 내고 꿀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화장실에 가다가 정말 너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뻔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놈이 있었다. 놈이 눈치 못 채게 뒷걸음으로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잠시 고민했다. '어제 그렇게 물을 내려보냈는데 어딘가를 붙잡고 버티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정도 강한 놈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복수를 위해 동생이 찾아왔나?' 아무튼 설마 이곳에 벌레가 있다면 한 마리뿐일 거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걸 깨달았다. 작전을 바꿨다. 가만히 보니 놈은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놈을 자극하지 않고 공존하기로 했다. 최대한 발걸음을 조심했고 화장실에서 볼일도 조심해서 보았다. 샤워를 할 때는 최대한 물이 덜 튀게 노력했고 샤워 물을 처음 맞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오는 아재 신음도 최대한 자제했다.

놈도 내 노력을 아는지 절대 움직이지 않아 주었다.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 늦게야 돌아오는 내 생활 패턴을 알고 낮에 경직된 몸을 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함께 있을 때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아 주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놈의 존재를 확인했고 오후에 다이빙에서 돌아오면 방문을 열며 놈의 위치를 확인했다. 며칠 후에는 심지어 혼자 오래 있던 사람이면 공감하는 사물에 말 걸기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러 놈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잘 있었어?' '어디 안 갔지?'

섬을 떠나기 전날 다이방 강사님과 마지막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왔다. 마지막이라고 마음이 풀어졌는지 놈을 확인 못 했다. 잠시 침대에 누워있다가 샤워를 위해 화장실에 가는데 놈이 없다. 순간 조건 반사로 나는 침대 위로 바로 뛰어 올라갔다. 침대 위에서 슬금슬금 기어가 테이블 위의 모기 기피제를 확보하고 바닥을 매의 눈으로 스캔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곳에는 놈이 없음을 확인하고 화장실로 접근했다. 불을 켜고 화장실 바닥을 확인했다. 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더 불안했다. 놈은 안 보이는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그동안 놈을 살려둔 게 후회됐다. 화장실 하수구로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게 후회됐다. 매정한 놈. 하루만 참았으면 좋은 기억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는데.. 그날 밤은 침대에 누워서도 불안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놈의 자리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비어 있었다. 나는 샤워를 허둥지둥 끝내고 얼른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했다.



결론적으로 숙소 예약비는 돌아오기 전날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며칠을 그곳으로 돈 받기 위해 출근하는 동안 전형적인 수법을 다 당했다. '담당자가 고향에 갔다. 연락이 안 된다. 좀 있으면 올 거다.' 더는 안되겠다 싶어 경찰의 힘을 빌려야겠다 생각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다이빙 강사님에게 이야기했다.

'여기는 경찰이 없어요'
'??????'
'길리 트라왕안에는 세 가지가 없어요. 경찰, 개, 공해를 일으키는 교통수단'

강사님 덕분에 공권력을 포기하고 끈질기게 귀찮게 해서 돈을 받아냈다. 물론 조금 손해를 보긴 했지만..

길리 트라왕안에서 '있다 없어진 놈'과 '계속 없는 것'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17/0200000000AKR20161217051300009.HTML


얼마 전 인터넷에 난 기사다 길리 트라왕안에서 도둑질하다 걸렸는데 경찰이 없기 때문에 도둑이라는 푯말 쓰고 행진하는 모습.



P.S : 길리 트라왕안에서 발리로 다시 돌아와 며칠을 보냈다. 발리의 숙소는 나름 가격 대비 괜찮은 곳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그놈(?)을 만났다. 그걸 보고 그놈은 인도네시아에는 어디든 사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트라왕안에서의 숙소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지 않기로 했다. 어디든 있는 놈이 나타난 거니까..
그런데 지금 이 글을 포스팅하며 갑자기 무언가 머리에 번뜩이고 소름이 돋았다.
혹시 그놈이 내 트렁크에 들어갔다가 발리의 숙소에서 다시 기어 나온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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