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샘 Sep 22. 2024

고부사이



한해동안 시댁과 합가해 같이 살았다. 나는 워킹맘이었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할머니가 필요했다. 친정엄마도 하던 일을 당장 그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 난감했는데 시어머니가 흔쾌히 우리집으로 내려와주셨다. 시어머니는 한순간에 생업을 포기하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세간살이를 전부 들고 내려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오로지 아들내외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남편과 나는 시어머니덕분에 걱정없이 일을 했고 가사노동과 육아의 언저리를 애매하게 맴돌며 운동도 하고 간간히 데이트도 했다. 그 시간동안 아이들곁에는 언제나 시어머니가 있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고위험군 산모로 분류되어 석달간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화장실갈 때만 제외하고 하루종일 침대밖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엄마의 빈자리가 길어질수록 오롯이 나 대신 아이와 남편을 지탱해 준 것도 시어머니였다. 

하지만 시댁과의 합가는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와 나는 사소한 문제로 많이 다투었다. 새파랗게 어린 며느리와 다 늙은 노인네가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하극상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 고부관계는 정상의 범주를 넘어 때로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빨래 건조대에 내가 걸어둔 양말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를 치셨고, 남편과 나는 아침을 먹다 말고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늘 화가 난 듯 투덜댔으며 뽀족한 말을 내뱉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급기가 반나절 집을 나가기도 했다. 갈데도 없었지만 나라도 잠깐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가족들은 어머니와 나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며 지쳐갔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서로를 위하는 지나친 배려가 몸에 부담을 준 결과였다. 나는 어머니께 과하게 잘 하려고 노력했고 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선을 넘지 않으려 부던히 노력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은 마음에 조금씩 상처를 냈다.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와 나는 서로가 서로를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달았다. 

미운정은 고운정보다 훨씬 무섭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미 몇해 전 바닥을 쳤고 더이상 회복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을 어찌저찌 건넜다. 어머니도 나도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 사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워킹맘에서 전업주부로, 우리 가족은 주말부부에서 외벌이 가정으로 새로운 옷을 입었다. 속단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내가 너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 사이에는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려서도 안된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다시 한번 시간의 힘에 나약한 몸을 기대어 본다. 신혼 초에는 입맛에 맞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했던 어미니의 음식이 이제는 정말 맛있다. 음식이 변했을 리 없으니까 내 입맛이 변했을 텐데, 입맛은 변하기 쉽지 않으니까 결국 변한건 내 마음이다. 시어머니가 종종 하시던 말이 있다.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20년은 지나야 내 며느리가 된대. 서엘이엄마랑 나도 20년은 지나야 진짜 시어미랑 며느리 관계가 되지 않겠니" 

20년이 지나려면 아직 한창 남았으니 남은 세월동안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건 나와 어머니의 과업일 것이다. 닮지 않은 듯 닮은 성격의 우리 둘, 조심성많고 예민한 사람 둘이서 만나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다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나. 무례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를 어여삐 여긴다. 그건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 예뻐서 예뻐하는게 아니다.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은 우리의 관계를 풀어갈 유일한 열쇠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다. 슬프지 않고 지금처럼 정정하셨으면 좋겠다.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못된 자식이지만, 자식의 마음만큼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은 지금처럼 내 모습 그대로 어머니곁에 서 있는 것이다. 건강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맛난 음식 많이 먹고 좋은 것 많이 보시면서 사시기를 기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쓰는 사랑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