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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16. 2020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악당이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 책 중에서 -


  요즘 한창 부동산값이 들썩이는 서울 근교의 광교라는 곳을 찾았다. 한 유명 방송인이 운영하는 책방을 구경하고 싶어 일부러 찾아간 곳이었다. 그 서점은 원래 작은 동네 책방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소위 핫 플레이스로 불리는 종합쇼핑몰에 분점을 내었단다. 개인 자본으로 시작한 서점이 꽤 성공을 했다고 평가받아서 예전부터 기회가 되면 방문해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특히나 그 방송인이 펴낸 책에서 그는 일본의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서점을 답사하여 북큐레이션과 공간 디자인, 책과 다른 매체를 연결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새로운 서점의 기능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고 했다. 그처럼 서점을 운영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방에 가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이야기가 가득한 새 책을 손에 집어 들고 밍기적거리며 서점안을 배회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놀랍게도 그 서점은 커다란 종합쇼핑몰이 아닌 한 아파트 상가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그 상가건물의 이름이 ‘무슨 무슨 아파트상가’가 아니라 새로 생긴 건물의 이름처럼 독자적인 네임을 가지고 있어 헛갈린 것이다. 그 아파트는 럭셔리 중에서도 최고급 럭셔리를 지향하고 만들어진 듯 했다. 거짓말을 좀 보태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어린이 병원, 어린이 약국, 미술학원, 음악학원, 애견숍, 커피숍, 한식당, 중식당, 일식당, 양식당은 기본이고 각종 전시를 위한 갤러리와 인테리어숍, 비싼 옷가게, 화장품 가게도 입점해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1층 한 공간에 서점이 있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촌사람이라면 촌사람이다. 그래도 나름 럭셔리를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은 호텔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 고급스러운 상점에서 나는 조금씩이나마 럭셔리의 언저리를 경험하며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 지금같은 인터넷시대에 직접 가 보지 않아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으며,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은 좀 차이가 나더라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심 많이 놀랐다. 상가건물 전체에 울려퍼지는 우아한 선율의 클래식, 유니버설 디자인과 어린이의 취향을 저격한 만화 캐릭터를 절묘하게 배치한 화장실이며, 아파트 바로 앞에 위치한 호수를 한 바퀴 빙 둘러볼 수 있는 셔틀버스와 야외 썰매장까지, 참 많은 편의 시설이 놀랍게도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하얗게 위용을 자랑하는 커다란 썰매장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놀라워 나는 연신 여러 구도로 사진을 찍어 지인들에게 이 신기한 광경을 알려 주었다. ‘여기 아파트 상가 안에 썰매장 있어, 오 마이 갓!’


  사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잘 사는데 관심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잘 살아도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 문제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려고 권한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겠기에, 실존주의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내가 실존주의에 접근하는 실용주의적 방법이다. 삶은 곧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지금 책을 쓰는 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죽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다. 인간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숨을 한 번 들이 마시고 내쉴 때마다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다 살면 그 때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을 뿐이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완성된다. 쉰다섯 해를 산 나는 이미 쉰다섯 해 죽은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삶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역이 옳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 책 중에서 -


  넓은 통유리창으로 썰매장이 내다 보이는 어느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내가 멍하게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나 보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부러워서 그러냐고 물어본 것 같다. 그 때 나는 정확히 말하면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몰라 필사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해 보려는 중이었다. 오래전 한 번 읽고 좋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그 책을 절박하게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야, 부럽지는 않아. 그런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나는 평소에 유머라고는 한 티스푼만큼도 쓸 줄 모르는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더 위트있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덩달아 남편도 난데없이 진지하게 밥을 먹게 되었다. 짧게 대답을 하고서 밥을 먹는 와중에도 사실 나는 조금 멍한 상태였다. 짧은 찰나에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낯선 광경의 어색하고 막막한 현실이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끝에 느껴지는 실제적인 긴장감과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어제 강남에서 먹은 사만 이천원짜리 우동과 이만 삼천원짜리 성게알 계란찜의 당혹스러운 맛과 양으로 인한 짜증이 조금 남아 있었고, 십분에 삼천원씩 하는 청담동 어느 건물의 주차비가 아까웠다. 그리고 오늘은 상가 건물에 썰매장이라니. 이번 서울 여행은 연이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적은 월급이지만 소중하게 벌어서 가늘고 길고 안전하게 정년까지 쭈욱 일을 하는 것이 목표인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분명 놀라고 불편할 법한 현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능력껏 벌어 돈을 쓰고 사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고, 땅 값이 비싸서 자연스럽게 물가가 비싼 것도 안다. 다만 서울에 살면, 특히 이런 물가가 비싼 동네 살이를 경험하면 상대적으로 럭셔리하게 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연민과 열등감의 늪에 빠지기 쉬울 것 같다. 살다보면 갑자기 무엇인가에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멈추어 서서 깊은 상념에 빠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그 때 그 썰매장과 서점과, 그 모두를 내다 보며 밥을 먹었던 순간이 그랬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는 평생을 힘들게 번 돈을 모아서 삼만원씩, 오만원씩 나에게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는데, 그 용돈이 받기 너무 미안한데, 안 받으면 할머니한테 더 미안해질 것 같아서 늘 망설이면서 그 돈을 받곤 했는데 말아야. 갑자기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그리고 며칠 전에 간이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 난처해하는 나에게 주머니에서 꽁치꽁치 우겨둔 휴지 뭉치를 주시던 야채노점상 할머니도 계신데, 아파트안에 썰매장이라니. 이런게 현실이라니! 뭐 잘못된 것은 없는데, 그래도 뭔가 기분이 나쁘다. 유명 서점을 구경하겠다고 기껏 찾아온 곳이 아파트 상가라니! 차리리 이 시간에 몇 달 전 신청해 둔 봉사활동 일정이나 한번 더 체크해볼걸. 뭐 하는 짓이람! 학교에서 애들한테는 또 뭐라고 해야 하는거지? 누가 선생 아니할까봐, 또 애들 생각이군. 아무튼 이겨 낼 수 없는 이 빈부의 격차, 부동산 투기, 돈이 주는 무자비한 안락함을 말해주어야 하나? 모르고 살면 좋았을 것을, 오늘 괜한 것을 보아서, 이제 아이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과연 우리 사회가 열심히 노력하여 공부하고 배우면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일까? 이런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내가 가르치는 우리 애들과 비교하면, 말하고 먹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완전히 다를 거야. 이런 현실을 보고도 열심히 공부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 거야? 여기 아파트가 최소 15억은 줘야 한다던데, 그래도 되는 거야? 15억에 대출을 끼더라도 최소 몇 억은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데, 무슨 일을 하면 그 돈을 벌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사업을 하거나, 부자 부모를 만나서 돈을 물려 받거나, 부동산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셋 중 하나겠군.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꿈은? 내가 지향하는 삶은 뭐지? 돈이 주는 안락함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지금 나는 부러워하고 있는 거야? 그럼 공무원 그만두고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인 거야? 휴, 오늘 점심은 그리 비싸지 않아서 다행이군, 어제 그 손바닥만한 계란찜을 이만원 넘게 받는 건 정말 너무했다!’


  연대는 일과 놀이를 함께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구현되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선다. 세금을 납부하고,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투표를 하고, 정당을 만들고, 이웃을 돕고, 시위를 하고, 유기동물을 보살피고, 아프리카 어린이의 교육을 후원하고,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구하고, 온실가스 배출과 에너지 소비를 자제하는 행위들은 모두 사회에, 국가에, 인류에, 생명에, 지구 행성에 대한 귀속감을 느끼고 표현하는 일이다. 연대에 참여하는 것은 일, 놀이, 사랑과 함께 의미 있고 기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것 없이는 삶을 완성할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중략) 정치에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목표를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제대로 정치를 하려면 가치관이 뚜렷하고, 정책에 밝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본일 뿐이다. 정치를 잘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 책 중에서 -


  직장을 다니는 엄마를 대신에 나를 키운 것은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노점으로 야채장사를 하셨는데, 그 규모가 ‘장사’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플라스틱 바구니 여러 개에 몇 가지 종류의 야채를 담아서 길가에 놓고 파시는 수준이라서 그 날 버는 돈은 할머니 혼자 쓰시기에도 부족했다. 엄마나 이모들이 주는 용돈과 노령연금이 없었다면 할머니는 아마도 정말 힘든 노년을 사셨을 것이다. 다행히도 딸들을 잘 키운 덕에 할머니의 삶은 생각만큼 초라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걸쳐 아끼고 절약해온 생활습관은 수중에 돈이 넉넉할 때에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정말 착한 사람이셨다. 늘 어려운 이웃을 돕고 위하는 것이 말과 행동에 베여 있었고 가방끈이 짧아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셨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안 해본 일이 없고, 딸 넷을 낳아서 없는 살림에 정말 열심히 한 삶을 사셨던 외할머니를 나는 내가 아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할머니의 차가운 볼을 어루만지면 정말 많이 울었다. 몇 번의 죽음을 목격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낸 적이 많았지만, 외할머니를 떠나 보내던 날들은 마음에 가장 깊고 무거운 슬픔으로 기억된다.


  설 연휴를 맞아 가족들과 외할머니를 모신 납골당에 갔다. 언제나 그 곳에 가면 대리석너머의 유골함을 만져 볼 수 있기라도 하듯, 유골함이 들어있는 좁은 벽안의 공간을 손바닥으로 느끼고 싶어, 애꿎은 벽면을 수차례 쓸어 만진다.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크고 넓게, 정직하고 멋지게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 분의 평생의 삶을 통한 가르침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짧은 인사를 할머니에게 건네고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서 건강하시라고 빌면서, 나는 질문과 동시에 답을 얻은 것 같다고 느꼈다. 서울을 다녀온 이후로 줄곧 머리에 맴돌던 질문들이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 가족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나의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교사가 되어야 할까?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무엇을 할 때 나는 행복한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은 아홉 개 또는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들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 카뮈 -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그 의미를 충족하는 삶을 살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한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과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해도, 의미를 모르는 삶은 비천하고 허무할 뿐이다. (중략)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 책 중에서 -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도 내적으로 충만한 삶,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람들과 대화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 넉넉하지 못할 때에도 스스로 나의 삶을 비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삶, 하루하루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작게나마 나의 노동으로 번 돈을 소중한 사람들과 의미있는 것으로 채우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마음이 대답했다. 불현듯 깨달은 것은, 이미 내 안에 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는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지도가 있었는데,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만 바깥을 보고 사느라,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랑하는 나의 외할머니처럼, 나는 홀로 성실하게 한 사회의 당당한 시민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가진 것이 많다면 감사하고, 가진 것이 적어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며, 나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긍정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삶을 나는 꿈꾸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대답은 조금 더 구체화 되고 조금 더 다듬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여기까지, 나의 뿌리를 찾고 나의 마음에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의 삶을 되새기고, 그로 인해 내가 배운 것들을 기억하고, 내가 스스로 경험하고 터득한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한 번 더 가슴에 새기는 것으로 수많은 질문에 답하려 한다. 구체적인 삶의 지침들은 앞으로 차차 고민하고 경험하면서 또 기록에 남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유독 나의 천사같은 그녀가 많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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