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경 작가가 눈뜨자마자 30분동안 글쓰라고 했다. 머리도 묶지 말고, 세수도 하지 말고 그냥 쓰라고 했다. 되는대로 쓰라고 했다. 커피도, 화장실도 어지간하면 참으라고 했다. 휴대폰은 당연히 쳐다도보지 말고 바로 어디든 앉아서 글을 쓰라고 했다.
어젯밤 잠들기 전 그 대목이 떠올라서 내일 아침에 해봐야지 했다. 무조건 30분 글쓰기를 하라고 하니 뭐에 대해 써볼까 혼자 생각했다. 아 이러다 잠이 안들겠는데... 뭐에 대해 쓸까 고민할 것도 없이 "이은경이라는 작가가 아무 것도 말고 글 쓰라고 했다."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바로 일어나려고 했는데, 아무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나가서 글쓰는 자리로 가라고 했는데… 남편은 이미 일어나서 거실에서 운동 중이고, 내 발에 걸친 것이 있었으니 강아지! 아이들이 일어나서 "엄마, 엄마" 하지 않으니 그래도 성공이다. 강아지야 조금 봐주면 내 발 옆에 와서 누울테고, 남편은 하던 운동 계속 할테니까.
분명히 바로 일어날 것이라 다짐했는데 어쩐지 그냥 일어나면 손해인 것 같다. 그래서 베개 저 뒤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내 블로그를 한 번 보고, 내 브런치를 한 번 보고, 미국 주식이 어떻게 됐나 한 번 보고. 그만 보자, 일어나자! 내 옆에 자는 딸래미 안 깨우고 스윽 침대에서 나오는 것 성공!
커피를 내리는 것도 사치라고 했는데, 안방과 가장 멀고 저 끝에 있는 내 방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 어깨도 안펴지고, 허리도 구부정, 그러다 요가 매트에서 운동하던 남편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허리 펴고! 어깨 펴고!" 한다. 알겠어 알겠어. 내 허리가 이리도 길 줄이야, 펴지려니 너무 오래 걸리네.
그래도 애써서 걸어가는데 강아지가 아주 신난 몸짓으로 앞 다리를 하나 둘 박자 맞추면서 콩콩 뛰기도 하면서, 귀를 펄럭이며 나에게 온다. 화장실 바로 앞에 배변 패드를 깔아놨는데, 어젯 밤엔 정조준 했나보다. 자기가 잘한 건 꼭 칭찬을 받아야하고 그게 삶의 낙인 강아지는 내가 그걸 보고 "아구 우리 보리 잘했어. 이렇게 잘했네! 정말 잘했어." 하며 목을 비벼주고 긁어주고 쓰다듬어주길 바란다.
"보리야, 여기에 쉬했어? 아이구 정말 잘했네 잘했어!" 하며 이쁘다고 해줬는데, 어째 오늘은 더 칭찬하라고 쪼그려 앉은 나를 넘을 기세로 높이 뛰어오른다. 너의 점프실력은 알아줘야 해. 내 방 앞까지 한참 걸려 왔는데, 왜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을까? 아! 강아지 패드를 버리러 주방 뒤에 가느라 그랬지. 그러다 내 발은 머물렀다. 커피머신 앞에. 다시 방으로 갔다가 커피 생각나서 다시 돌아오는 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니까 온 김에 커피를 내려가자 마음 먹었다. 이은경 작가는 커피도 사치라고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주황색 컵에 커피가 가득 담기고, 이제 정말 글쓰러 가야지 하고 식탁을 도는 순간, 강아지가 화장실 쪽으로 간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큰 일을 보신다. 그리고 한 번 더 나에게 토끼처럼 달려온다. 깡충깡충, 털을 휘날리며, 귀를 펄럭이며. 칭찬세례를 한 번 더 해야하는군, 나 글 쓰러 가야 하는데. 귀찮다고 칭찬을 안하면 바로 심술을 부린다. 배변 패드 바로 옆에 쉬를 하며 나를 약올린다. 그래서 칭찬은 무조건 한껏 업된 표정과 목소리로 해야한다. 강아지야, 난 저음이 편한 사람이라구.
"엄마~!" 글쓰기는 글렀나보다. 큰 아이가 일어났다. "엄마~!" 아이들은 안 깨우려고 조용히 다녔는데 강아지 칭찬하는 소리에 깼나보다. "엄마, 김치피자탕수육 알아? 어제 급식에 나왔는데 정말 맛있다! 애들이 다 좋아했어. 등 긁어줘." 김치피자탕수육이라니? 이 조합이 맛있다고? 신기하다!!! 이건 마치 김치 파스타 고추튀김 같은 느낌인데? 애들이 다 좋아하는 맛이라니 역시 영양사 선생님의 창의력과 맛있게 만들어버리시는 조리사 분들의 실력이 대단하다!
점프! 점프! 이 와중에 계속 아침 운동마냥 뛰고 있던 강아지, 자기를 더 보라고, 왜 더 칭찬 안하냐고 시위 중이다. 사실 안다. 이건 간식을 내 밥그릇에 좀 넣어줘야지, 예쁘다고만 하는 건 칭찬이 아니야, 간식 줘!!! 하는 거다. 새끼 손톱의 절반 크기로 간식을 잘라서 또 작게 부셔서 밥에 섞어 주었다. "정말 잘했어."라고 말하면서. 이제 나는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겠다.
어제 생각했던 대로 "이은경 작가"로 글을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약 15분 걸렸다. 유난히 줄줄 써졌다. 이런 일이 다있네. 잘 써도, 못 써도 이은경 작가 덕분 또는 이은경 작가 때문에 라고 쓰려고 했다. 내 책임이 아니고 다 이은경 작가의 탓 또는 공으로 돌리려고 하니 어쩐지 글에 대한 부담이 하나도 없다. 이런게 든든한 뺵이 있는 느낌인가 싶다.
중간에 큰 아이가 "엄마 뭐해?" 하며 옆에 왔다. 나는 1초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속사포로 말했다. "이은경 작가 있잖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왜냐하면 글쓰기>의 옥수수 작가님. 그 분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하지 말고, 커피도 마시지 말고 화장실도 가지말고 30분 동안 글 쓰래. 그래서 지금 하는 중이야." 아이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라더니 미소도 크게 지으며 웃고 갔다.
이제 17분. 30분을 채우려면 13분이 남았는데, 이은경 작가를 계속 우려 먹을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계획에 대해 쓸 것인가 망설여진다. 아니면 17분만 쓸래요, 내일 18분 쓸게요 하며 말 안 듣는 학생 모드로 갈 것인가! 그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이은경 작가도 그랬다. 우리는 어른이고 누가 숙제 검사 하는 것도 아니고 더 잘 써오라고 채근하는 사람도 없다. 쓰는 사람 마음대로 해도 된다. 쉬어도 된다.
그래도 쓰라고 했다. 내 글을 읽어줄 고마운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높고, 출판사에서 거절 당할 가능성은 더 높다. 그래도 쓰라고 했다. 내 블로그도 사실 그렇게 시작됐었다. 처음엔 속풀이 하고 싶은데 어디에 털어놔야 할 지 모르겠고, 코로나라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새에 빠지고 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주변사람들은 점점 "새 이야기 그만 해. 그만 좀 하라니까." 했고, 나는 하고 싶었다. 새가 보이면 사진찍고 이런 새를 봤다고 블로그에 올렸다. 정말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던 시절이 3년 전인가보다.
새 이름을 알고 싶어서 네이처링앱을 쓰기 시작했고, 아파트 탐조단을 하면서 새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탐조하시는 분들의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새를 구경했다. 사진도 얼마나 잘 찍으시는지 나의 아이폰XS 화질과는 천지차이였다. 부러움을 넘어서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 사진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점점 탐조하는 분들이 내 글을 읽기 시작했고, 좋아요를 눌러주셨다.
신나서 썼다. 어떤 날은 서너개씩, 새를 볼 때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썼다. 아무도 안 봐도 그냥 썼다. 새 이야기 하고 싶은 내 마음을 온전히 받아준 곳은 다름 아닌 블로그였다. 그래서 내 블로그는 다듬고 고친 글이 거의 없다. 일단 쓰고 발행을 눌러버린다. 그래야 말을 한 것 같은 시원함이 있다. 블로그 글을 다듬어서 또는 새로 써서 올리는 곳은 브런치이다. 그래서 브런치는 더 무겁고, 부담스럽고, 더 진중하다.
30분이 지나버렸다. 30분만 쓰려고 했는데, 17분에서 멈추려고 했는데 해냈다! 내일은 17분에서 멈출까? 둘째도 일어났다. 어느 집에서 매운탕을 끓이나보다. 코가 맵다.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글을 쓰면 배가 고프다. 딸래미가 바닥에 누워서 엄마 타자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다. 멈춰야겠다. 지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