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처럼 살다 가고싶다
학창시절 유명한 철학자 헤겔의 이야기를 믿었기에 결혼해도 절대 싸우지 않을 줄 알았다.
하나의 입장(正)과 충돌하는 반대 입장(反)이 만나면 단순한 타협이 아닌 한 차원 높은 단계(合)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각자 번 돈을 따로 관리하자는 남편과 공동 관리해야 한다는 아내가 만나 생활비와 저축은 공동 관리하되 일정액은 각자 관리하는 아름다운 결론을 도출해 죽도록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식이다.
차원의 높낮이는 별도로 하더라도 정반합의 길을 통해 갈등은 당연히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막상 살아보니 책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신혼 초 나의 관점에서 보기에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수준 높은 차원의 해결책을 도출하려 하였다.
부드럽게 이야기하려 노력했지만 언성이 높아지고 불편한 마음이 말속에 녹아 들었나보다.
아내는 합의나 협의, 개선 등 아름다운 결론을 추구하는 대신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하며 한마디로 나의 어리석음을 정리했다.
“야단맞는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아내를 진정으로 좋아한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 아내의 잠든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모든 것을 떠나서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할 때 ‘야단맞는 느낌’이 절대 들지 않도록 이야기해야 한다.
나의 논리적 사고와 말재주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변증법 따위 이제는 필요도 없다.
지난 세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러다보니 저절로 갈등이 줄었다.
상상해보자.
‘야단맞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대화하며 싸우는 모습을.
싸우는게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우리가 이사하여 집들이 겸 축하하러 찾아 온 시누이 4명과 시어머니와의 식사에서 마음 불편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때도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 전적이 있다.
아내는 그냥 선하기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숨겨진 힘을 아주 가끔 드러내보였다.
인생의 절반은 함께 산 아내와 나는 이제 서로에 길들여 져 있다.
한해 두해 함께한 세월이 쌓여 이제는 첫마디만 꺼내도 나머지 말을 완성해 주고, 머리에 맴돌기만 하는 배우를 “거 있잖아 그...” 말만 해도 머릿속 배우 이름을 즉시 찾아내 주면 늘 신기해하며 아내는 해맑게 웃는다.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깻잎장아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아내는 나에게도 늘 신비롭다.
그전에는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밥상에 잘 내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예전부터 좋아했는데.
결혼 전반부에 내가 아내를 좀 더 잘 읽어냈다면 이제 결혼 후반부에는 아내가 나를 좀 더 관찰하고 챙겨 주리라 믿는다.
저녁마다 족욕물을 데워 대령하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희망에 차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글쓰기를 지난 3개월간 하느라 힘들었다.
다행히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갈등을 피하고 행복한 기억들을 만든 노하우를 떠올려 옮겨 쓰기만
하면 되어 막막하지는 않았다.
한 편의 글을 쓰는데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올린 글은 버스 운전 도중 쉬는 시간 틈틈이 핸드폰으로 수정하며 글을 다듬었다.
퇴고 과정이 거칠고 시간이 짧았기에 모든 글 속 미흡함이 느껴지나 시작은 원래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이상 아쉬움은 없다.
인생처럼 일단 저질러 보고 시작한다는 데 의미를 두니 마음도 편하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위해 처음 쓴 글을 덧붙이며 본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처음 쓴 이 글은 연재의 주제를 담고 있다.
현실 결혼 생활은 비록 수시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버티기 힘들지만, 버텨낸 세월이 쌓여 뒤돌아 바라볼 때 젊은 날의 아름다운 선택으로 생각되리라 믿는다.
아내와 함께 하는 불안정하지만 평온한 결혼생활은 근처 뒷동산 소풍나온 아이처럼 즐겁다.
시간이 흘러 집에 돌아가야 될 때까지 김밥과 사이다 먹고 마시며 새로울 것 없는 동산 주변 경치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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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무더위 때문인지 유독 수박을 자주 사먹게 된다.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가급적 좋은 수박을 사기 위해 많은 고민과 선택의 시간을 가져본 경험들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수박의 맛은 쪼개서 먹어보기 전까진 알 수 없으니 선택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는 대충 골라 사들고 와선 맛이 좋은 수박이라 스스로 정신승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좋은 수박 고르는 법'을 유투브에서 보고 난 뒤에는 당당하게 수박을 고를 수 있게 되었고,
우습게도 나의 전문가다운 포스에 자신이 선택한 수박은 어떠한지 물어보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유투브 전문가들의 영상을 본 결과 겉에 갈색 상처, 상흔이 있는 수박의 당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수박 하나 고르는데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왕이면 좋은 인생을 선택해 살아가기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하다.
결혼을 하기 위해선 결혼할 사람을 만나야 하고, 수박을 고르는 것보다 12배 이상 어려운 선택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는 선을 100번 정도 본 남자이며, 누구보다 많은 선택의 시간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28년 결혼생활을 거치며 내린 결론.
상처 입은 수박이 더 달콤하듯 어려움을 함께 겪은(어려움을 꼭 이겨낼 필요는 없다. 인생은 기니까...) 같은 상흔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부부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선택하기 위한 노력들이 쌓이면 비트코인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