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지나 추수의 계절 가을이 왔다

익어가는 인생, 기대되는 은퇴 이후의 일상

by 조용히정진

뜨거운 여름이 끝났다.


베트남에서 맞은 스콜(강풍이 함께 하는 열대 지방의 거센 소나기)처럼 수시로 폭우가 내리더니 9월 말이 되서야 선선한 가을의 맛이 조금 느껴진다.

재작년 말까지만 해도 복지시설 사무국장을 10년 수행하며 나름 보람도 느끼며 사무직 인생을 살았다.

만 53세에 드디어 사무직 유통기한이 종료되었음을 통보받았다.


6개월 실업급여 기간 동안 많은 이력서를 넣었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다.

단 한곳도.

50대 초반을 지나는 단 2년 사이에 업무수행 능력이 급감하는 일이 발생할 리 없으나, 삶의 기반이었던 나의 사회적 능력에 대한 평가가 하한선을 통과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바쁘지도 않는지 아니면 내가 그리도 좋은지 시련은 수시로 찾아와 만나자한다.

돌파구를 찾아야한다.


초가을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시작하여 한겨울 추운 바람에 덜덜 떨며 버스운전 관련 힘겨운 훈련을 받았다.

올해 초 50대 중반 초보자의 설움을 극복하며 겨우 버스기사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이 시작한 직업 마을버스 운전기사.

나는 다시 행복하다.


어제 종일 근무로 힘들었지만 오늘 하루는 쉴 수 있다.

힘든 근무의 반작용으로 휴일의 달콤함은 더 크게 느껴진다.

박찬욱 감독 영화 ‘어쩔수가없다’ 를 선택해 CGV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하며 아내와의 하루를 시작한다.

영화는 인생의 뜨거운 여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가장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이병헌은 아내와 두 아이를 한가득 품에 안고 조용히 자신에게 속삭인다.

"다 이루었다"

하지만 예상못한 실직으로 결실의 가을을 갑자기 건너 뛰어 하루아침에 매서운 한겨울 칼바람 속에 영문도 모른 채 서있게 된다.

사회적 평가 역시 주가 폭락을 잠시 멈춰주는 서킷브레이커도 없이 벼락처럼 하한가를 맞는다.


"이거 왠지 내용이 낯설지 않은데... 이야기가 아니잖아..."


실업자가 된 가장들의 다시 일어서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표현하며, 자리 하나에 네명의 인간은 너무 많다는 슬픈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관을 나서며 ‘영화 속 가장들 모습이 내 모습 같아 마음이 좀 불편해’하고 아내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원효대사의 말씀(一切唯心造) 처럼 우리 부부는 행복의 기대수준을 대폭 내렸기에 행복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다 이룬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춰 픽업을 하고 동네 샤브샤브 집에서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할 여유는 생겼다.

'엄마아빠는 외식하고 있다'는 가족 단톡을 보더니 개인 PT를 받고 난 둘째가 합세하고 뒤이어 헬스장 운동을 마친 첫째가 함께한다.

당연히 식사비는 엄마아빠가 내기에 합석하기를 매우 즐겨한다.


식사를 마친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때 우리 부부가 먹고 싱크대에 그냥 놓아두었던 그릇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아이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설거지와 빨래 등 집안일을 전담한다.

설거지를 했던 사람은 달력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기로 했는데, 형이 제대로 하지 않아 자기가 더 많이 일을 했다고 둘째가 투덜댄다.

이런 갈등을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하며, 이 능력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단다 하고 이야기해 준다.


우선은 설거지나 빨래 등을 하고 있지만, 빨래 건조대를 천장에 설치하거나 수전을 교체하는 등 집수리를 할 때 반드시 아들들에게 보여주고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나중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결과 여부를 떠나 믿고 맡긴다.

폭풍 같은 사춘기와 험난한 사회 진입을 무사히 마친 아이들은, 나이에 맞는 고민과 갈등을 시작하고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해한다.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익히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다 보면 성장하여 어미 새의 품을 벗어나 둥지를 훨훨 날아가는 새처럼 독립해 스스로 잘 살아가겠지.


우리 부부의 젊은 여름은 영화에서처럼 무더웠다.

태양의 밝은 빛은 젊은 우리를 환하고 힘차게 만들었지만, 뜨거움은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자국을 남겼다.

상처는 아물어 더이상 아프지도 흉하지도 않는 미세한 흔적으로 자리잡아 가끔있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변해가고있다.

나의 버스운전과 아내의 영아 돌보기는 비록 힘들지만 버텨내 온 세월의 내공으로 버겁지는 않다.

이제는 여름 지나 기분좋은 수확의 계절 가을로 접어들어 피부에 스쳐지나가는 바람마저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우리는 5년에서 10년 뒤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

충분히 가능토록 긴 세월 준비했기에 아이들이 결혼 하면 더 이상 일하지 않고 편히 살고자한다.

둘이 손잡고 하루 종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녀야지.

30년 정도.


설마 가능하겠지.

만약 안되면 어떻하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슬프겠지만 아내의 말처럼 70세까지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각자도생의 시대.

전세계적 트렌드를 나라고 피할 수는 없겠지.


영화 속 자리다툼은 버스기사에게는 아직 먼나라 이야기다.

힘들고 운전기술이 필요하며 AI가 운전대를 잡기엔 아직 10년이나 이르다.

버스기사의 정년은 비록 63세이나 부족한 기사인력으로 인해 거의 70세에서 75세 이상 근무가 가능하다.

버스운전직을 선택한 본질적 이유는 혹시 모를 인생의 변동성에 대비한 부분이 크다.

원한다면 앞으로 20년은 더 일할 수 있다.

건강하고 사고가 없다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수박의 달콤함은 수박이 다 익었을 때 맛볼 수 있다.

익어야 과일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듯 인생이든 결혼 생활이든 참맛은 어느 정도 시련을 겪은 뒤에 온다.

한여름 무더위 덕분인지 어느새 가을에 접어든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리 나쁘지않다.


수확의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자식들이 모두 훨훨 날아가 추수 끝난 텅빈 들판처럼 허전할지 모르지만 그날이 기다려진다.


인생의 마지막 계절은 달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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