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사라졌지만 ‘가장의 역할’은 여전히 필요하다
일이 꼬이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내는 마트를 사랑한다.
한 달에 한번 이상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며 아내의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것이 주요 일과다.
신나게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기름이 간당간당하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기름 값이 제일 싼 휴게소 주유소에 들렀더니 이미 차들이 길게 늘어서있다.
나중에 넣지 하며 집에 돌아온 뒤
그냥 잊었다.
왠지 매우 피곤해 보이는 운전기사가 보인다면 아마 ‘따불’을 뛰는 날이라 생각해도 된다.
하루 운전 뒤 쉬어야 되지만 항시 인력이 부족하기에 연달아 근무하는 날이 생기는데, 마침 나의 경우가 그러했다.
어제 종일 근무하고 2시간 잠을 잔 뒤 오늘 새벽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 그리고 다음날 다시 하루 종일 근무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있다.
쇼핑한 다음날 종일 버스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승용차 주유등이 붉게 물들어있다.
나는 새벽에 출근해서 남들이 다 퇴근하고 꿈나라에 드는 새벽에 퇴근한다.
근처 주유소 문은 이미 닫혀있고, 출근한다 하더라도 기름을 넣을 수 없다.
빨간 불이 켜지면 약 30km를 더 달릴 수 있는데, 회사와 집의 거리는 18km라 24시간 운영하는 곳을 찾을 수도 없다.
아뿔사. 내일 출근을 어떻게 하지.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때 내리는 식은땀이 하루 종일 내 몸을 적시게 되리라는 걸 미처 나는 몰랐다.
문제가 발생하여 갈등상황이 진행하면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혼 여행지에서 리조트 프런트에 전화 걸면 해결된다는 단순한 사실도 몰라 와인 마개를 열지 못했던 얼치기 청년은 이제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다.
힘든건 여전하지만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풀면 되는지 이제는 안다.
하얗게 된 머리를 진정시키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주관식 문제’를 즉시 ‘객관식’으로 바꾼다.
내가 가진 자원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해결책을 리스트업 한다.
1. 아침에 일어나 집근처 영업하는 주유소를 찾아 주유한다.
2. 둘째 아들의 차를 빌린다.
3. 택시를 타고 출퇴근한다.
새벽이라 1번은 불가능하고, 3번을 택하자니 고생하며 운전하는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고심 끝에 2번을 정답으로 찍었다.
마침 퇴근하며 내는 부스럭 소리에 잠에서 깨어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하는 둘째에게 내일은 회사 셔틀을 타고 출근하라고 말을 건냈다.
'네' 하고 답변하는 아들은 사실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말한다.
나 때문에 아들의 개인적인 스케줄이 틀어진다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아들의 차로 출근을 하니 회사 인근 정기주차장(회사는 주차장을 제공하지 않는다)께서는 새로운 차량으로 인식하며 퇴근 시 돈을 내놓지 않으면 차단기 문을 열어주지 않을 기세다.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복잡하고, 특히 나 때문에 힘들 아들 생각에 덩달아 버스운전이 점점 꼬이기 시작한다.
버스에는 ‘배차간격’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버스 운행속도가 늦어져 앞차와 시간이 벌어지면 정류장 승객수가 더 많아지고 버스는 늦어진다.
그러면 더 많은 승객이 타게 되고, 버스는 점점 더 늦어지게 된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진다.
아직 어둠이 내린 새벽 버스운전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생각한다.
아들 차로 출근해서 주유등의 빨간불은 해결했지만, 주유를 하지 못해 새로 발생한 문제는 또 해결해야 하니까.
1. 아들의 출근 여부 확인
2. 아들의 약속시간 지키기
3. 새로운 차량으로 인식한 주차 문제 해결
4.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버스운전 하기
첫탕 버스운행을 마친 휴식시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별 문제 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을 잘 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주차장에 미리 들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문제없이 출차 할 수 있도록 관리소장의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소장 본인이 자리에 없을 시를 대비해 차단기 리모컨 위치도 파악했다.
아들의 약속시간을 지킬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승용차를 타고 회사 퇴근시간의 아들을 직접 데리고 오면 된다.
전화를 걸어 ‘퇴근시간에 아빠가 데리러갈까?’ 물었다.
아들은 약속시간을 늦췄으니 걱정 말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킨다.
이제 대부분의 발생한 문제는 해결되었고, 버스운전만 안전하게 하면 된다.
복잡한 마음에 몸까지 아파왔고, 늦어진 배차간격에 피로는 급격히 쌓여갔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속도에 맞춰 마음도 진정이 되고 덩달아 버스의 속도도 정상을 되찾았다.
거친 폭풍을 맞은 것처럼 심신이 지친 나는 오후 3시 집에 들어와 뻗었다.
이 모든 일은 주유를 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다.
만약 복잡한 마음과 머리로 버스를 운행하다가 큰 사고라도 발생했다면 나는 직장을 잃었을 수도 있다.
‘나중에 하지’ 하는 마음으로 미룬 사소한 일이 점점 커진다.
20대 애송이 시절의 나였다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
사실 수시로 발생하는 것이 리얼 인생이다.
가부장제가 거의 사라져 가는 지금 ‘가장’이라는 단어 역시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정에서는 '가장'은 사라졌지만 ‘가장의 역할’은 항시 필요하다.
고스톱을 치더라도 누군가 패를 돌려야 판이 시작된다.
가족여행을 가기 위해 차에 오르더라도 누군가는 운전대를 잡아야 여행이 시작되듯.
구성원 개인의 문제이거나 가족 전체의 문제이든 해결해야 할 일은 늘상 발생하며, 누가 되었든 이러한 갈등을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면 1+1=2 가 되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수시로 찾아올 수 있다.
그럴때면 주관식으로 막막해 하지 말고 객관식으로 문제를 바꾸어 보자.
힘들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심호흡 한번 깊게 하고 다시 버티자.
버텨낸 세월은 비록 문제의 발생을 막아주지는 못하더라도 해결책은 제시해 줄 것이다.
아차.
기름을 안 넣었다.
내일 또 이 상황이 되풀이 되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