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성적표

배점 높은 과목에 집중하자

by 조용히정진

봄볕이 따사로운 4월의 어느날 아침 40년 동안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 학이와 만나 브런치와 산책을 했다.
그간 살아왔던 이야기와 곧 맞이하게 될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3시간에 걸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의 핵심은 60세 또는 65세 은퇴를 할 때 우리는 인생의 총체적인 성적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국영수 같은 정해진 과목을 통해 쉽게 성적을 매길 수 있고 반 등수와 전교 석차가 표시된 성적표를 받는다.


하지만 인생은 다르다.

돈, 건강, 사회적 지위, 자유로운 삶 등 삶의 여러 구성요소에 자기만의 배점을 부여하고, 차근차근 점수를 쌓아가다 은퇴시기 부근에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최종적 평가는 세상을 떠날 때야 가능하겠지만, 은퇴 당시 매겨진 점수가 크게 변동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학창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 시험 기간이라 교실에서 공부 하려 했는데 이미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친구의 책상 위를 보니 국어를 공부 중이었다.

갑자기 그 친구가 시험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 친구는 참고서 1페이지부터 80페이지까지 시험 범위에 있는 내용을 그냥 읽는 것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장면이 생생하게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걸 보니 그 장면이 매우 놀라웠던 것 같다.

시험 범위 모든 부분을 다 읽는 것으로 공부를 한다고 인지하고 있구나.
내가 생각하는 공부는 무작정 읽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험에 나올 핵심적인 부분을 먼저 선택해 양을 줄여야 하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친구는 집에 가서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내 기준에서 보면 아닌 것이다.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며칠 전 늦은 밤 11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 밤중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누구세요?

나 상이야.

아주 반갑게 이야기를 한다.
이 녀석이 웬일이지?

그 친구와 통화하지 않은 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아마 술 한 잔 한 모양이다.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옛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워진 나는 영업일을 시작했다.

고향까지 내려가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 친구는 나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때 자신의 형편이 나쁘지도 않았는데 거절해서 정말 마음이 걸린다고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하며 뜬금없는 옛 이야기를 막 한다.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전화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몇 분 통화하다 그 친구는 지금 자신이 너무 힘든 상황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용직 노동 속칭 노가다를 하며 살고 있다고.

적당한 스몰토크와 잘 지내라고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침 같이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인생의 성적표를 받았군. 좀 일찍 받았네“

우리 나이는 만 55세.
현 상태에서 큰 변화를 도모하기는 어려운 나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최종이라기보다는 중간평가 성격의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성적표 위에 표시된 내용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친구는 본인의 예상보다 나쁜 성적표를 받은 것이라 느끼는 것같다.
난 예전에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나의 기준으로 보면 친구들에게 내 나름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 옛 정이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갑자기 과거가 떠올랐나?

지금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이번에는 지워진 친구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다른 의미로...

나이와 성향에 따라 희망하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은 언젠가 자신만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나는 힘든 세상살이를 오래도록 함께 버뎌내어 같은 세월의 상처가 곳곳에 묻어 있는 늙은 배우자와 함께 하는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꾼다.

그리 어렵지 않은 경제상황 속에서 취미를 즐기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

가끔씩 장성한 아들들의 안부 인사를 받고, 1년에 한두번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원한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엔 너무 늙고 쇠약해져 식사하는 동안 지난날의 영웅담만 반복해서 늘어놓더라도 우리 아이들은 늘 호기심어린 눈빛과 표정으로 마치 처음 듣는것처럼 들어주리라 믿는다.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그날 너무 실망하지는 않도록 우리 부부는 지금도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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