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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05. 2023

니모를 찾아서

보라카이에서의 첫 일정은 광명보라카이의 '스스호핑'이라는 투어였다.

스노클링과 스킨다이빙을 가르친 후 프라다이빙 1 레벨 자격증을 발급하는 투어였다. 당연히 참가자 전원에게 자격증이 발급되는 것은 아니고 기준에 적합할 때만 발급된다. (근데 사실 바다에 들어갈 줄 알면 거의 발급되는 것 같기도...) 비슷한 내용의 투어 업체가 몇 개 더 있었지만 다른 곳들은 인생 사진 촬영에 비중을 두고 있던 반면 이곳은 교육에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스스호핑을 선택했다. 물론,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나 또한 인생 사진에 집중했을 테다. (인어공주 샷, 사실 그거 나도 갖고 싶다고... ㅠㅠ)

오전 내내 바다에서 교육을 받은 후 바로 실전, 자격증 발급 여부 판단 및 동영상 촬영인 교육이라 내가 과연 겁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10살 아들이 힘들어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낼 수 있을까, 많이 고민되었지만 마침 11월 한 달간 2만 원 할인 행사가 있어 결국 신청하고 말았다. 자격증을 따지 못 하거나 중간에 포기하게 되더라도(아들은 나이가 어려 처음부터 발급 대상이 아니고, 나는 겁이 많아 중도 포기하더라도) 스노클링과 다이빙을 배워두면 이후 보라카이에서의 일정을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일찍 다이빙 샵으로 가서 강사님과 다른 참가자들과 인사를 한 후 바로 화이트비치로 이동했다. 전날 보라카이에 도착한 후 스파에 갔다가 바로 숙소 체크인을 했기에 보라카이 바다를 이제야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잔잔하게 빛나고 있는 바다를 보자마자 "으아아아..." 하는 나지막한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발이 동동거려졌다. 뭐지. 뭐가 이래? '실화야?' 이런 말 평소 거의 쓰지 않는 말인데, 그날 기분이 진짜 그랬다. "이거... 실화야?"   

아마도 그날의 태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내 생애 가장 강렬한 태양이었다. 이전까지 그렇게 눈 부신 빛은 본 적이 없었다. 보라카이에 있는 일주일 중 가장 맑은 날이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한없이 뜨거웠다. '눈이 멀 것만 같은 빛'이라는 말은 그저 꽤 밝은 빛을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려니 했는데 백사장 위로 내리쬐는 하얀빛과 푸른 바다를 투명하게 흔들고 있는 반짝임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로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주변이 온통 하얗고 뜨거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세게 쏟아져내리는 빛을 마주하자 몸 어딘가가 조금씩 아려왔지만 이렇게까지 이글거리는 빛은 처음이라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것을 느꼈다. 그저 좋았다. 이런 빛이 있다니. 이토록 하얗게 부서지는 빛이 있다니. 빛이 산란되어 부서지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 위로 내리쬐는 빛의 어우러짐을 보면서 '찬란하다'는 단어의 쓰임을 제대로 배웠다. 에메랄드를 본 적이 없어 그 빛깔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런 빛이 에메랄드 빛이구나, 그것 역시 그날 깨달았다.

사랑을 글로만 알던 이가 실제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는 '아, 이게 사랑이구나'하며 단숨에 그 감정에 매혹되는 것처럼 나 또한 그 태양과 그 바다의 찬란함에 매혹되고 말았다. 모르고 있던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그곳을 위한 또 다른 감각이 생겨난 듯했다.


강사님의 스타일은 꽤나 스파르타였다. 10살 아들에게만 "너는 하고 싶은 만큼만 해."라고 했고 남편과 나, 어린 아가씨 4명에겐 상당히 강행군으로 다이빙 자세와 호흡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사실 난 그 부분이 좋았다. 이 분은 진심이구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뭐라도 될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바다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접어 들어간 후 유영으로 이어지는 동작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이 도무지 따라 주질 않아 답답하고 속상했지만, 물에 대한 두려움만큼은 거의 사라져 강사님이 바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하시면 냅따 덕다이빙을 시도하곤 했다.

물 안으로 쑤욱- 빨려들 듯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일순간 숨이 막히고 입 안 가득 바닷물이 밀려들어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믿을 수가 없어 물 안으로 연신 머리를 집어넣었다.

보라카이에 오기 전 이곳과 관련된 영상과 이미지들을 꽤 많이 봤었다. 바다의 빛은 이러할 테고 물살은 이러한 느낌으로 나를 간지럽히겠지. 많은 상상들을 해왔다. 어느덧 머릿속엔 내가 상상하는 보라카이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기에 어쩌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실제 마주한 그곳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빛을 지니고 있었다. 태초의 지구가 만들어 낸 명화 같았다. 빛이 파도를 타며 일렁이고 있었는데 그 빛이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아 계속 물살을 가르며 손을 저었다. 내 팔 위로 그림자를 지우며 일렁이는 물살의 움직임이 아름다웠다. 숨이 꽤 가빠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몽롱해져 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내내 호흡이 불안하던 남편은 결국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로 포기를 선언했다. 강사님께서 끝까지 마인드컨트롤을 해보라 하시며 포기하지 말기를 권하셨지만 남편의 눈빛은 이미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내가 알던 눈빛이 아니었기에 "이 사람은 안 되겠어요. 나가야 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우리 가족 모두 포기하려고 했었다. 남편만 그런 것이 아니라 10살 아들도, 나도.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눈에 띄게 부족한 실력이었기에 강사님께선 우리 가족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다른 분들께 아주 미안했던 것이다. 남편이 먼저 바다에서 나간 후 뒤따라 나가려는 우리를 강사님이 붙잡았다. 끝까지 해보자 하시며 "나 지금 괜찮아. 나 지금 편안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한테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니모나 보러 가자고 하셔서 홀린 듯 이끄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했던 니모. 주황빛의 자그마한 생물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난 원래 감정기복이 심하여 극적인 순간을 자주 만나는 편이며 가끔씩은 꽤 울보라서 니모를 만나면 좀 울겠지, 생각했었는데 니모만큼은 반전이 없었다. 생각했던 대로 정말로 눈물이 났다. 얼굴이 온통 바닷속에 잠겨 있었으니 그게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그렁거리며 차 오르고 있었다. 스노클을 입에 물고 엉엉, 니모야, 했다.


  시간의 교육으로 내가 바다 안을 멋지게 유영할  있게 되었다거나 멋진 자세를 뽐내며 움직일  있게 되었다거나 하는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덕다이빙을 두려움 없이 (시도)  있게 되었고 아주 드물지만 다이빙과 유영이 그럭저럭 이어졌으며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있게 되었다. 남편은 자격증 취득은 포기했지만 교육만큼은 끝까지 받았던 터라 컨디션을 회복한  바다와 숙소 수영장에서 내내 연습했었고 나중에는 나보다  잘하게 되었다. 우리 저기까지  보자, 하며 남편과 물살을 가르며 헤엄쳤던 순간의 희열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같다.


바다 안은 아름다웠고 황홀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니모와의 만남. 빵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더니 니모가 내 손가락 사이를 헤엄치고 다니며 툭툭 나를 건드렸다.
그날의 태양은 정말 뜨거웠고 그 햇살을 품은 바다는 투명한 초록빛으로 일렁였다.
엄마, 바다 안이 너무 신기해,라고 아들이 말했다.  


그리고, 이 날 이토록 눈부신 체험의 대가로 아들은 엄청난 썬번을 경험하게 되고 나는 그릴 위에서 골고루 잘 굽힌 생선구이가 되고 만다.


#사진 출처: 광명 보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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