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앞두고 모아나 머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보라카이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주말엔 단골 미용실에 가서 모아나 머리를 해달라고 했다.
"모...뭐요? 모아나? 그게 뭐예요?" 하던 원장선생님께 모아나를 검색해서 보여주니 빵 터지셨다.
히피펌이네? 하며 깔깔거리시다가 이걸 모아나 머리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갑자기 이게 왜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여행 때문이라고 하긴 어쩐지 부끄러워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이런 머리 해보고 싶어서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머리카락이 너무 가늘고 길이도 어중간해서 모아나처럼은 안 될 거라며 살짝 망설이시기에(단골 미용실 원장쌤은 아주 단호하시다. 안 될 것 같은 건 진짜로 안 해주신다) 모아나 같지 않아도 된다, 그저 족장 딸처럼만 보여도 된다는 말로 간신히 설득하여 미용실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거울 속엔 모아나를 기대하며 잔뜩 들뜬 나와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으로 갸웃거리는 원장 선생님이 있었다. 괜찮아요, 망하면 바로 다 자르세요, 삭발 빼고 다 좋아요,라는 말과 함께 몇 번의 설득이 더 이어진 후 드디어 내 머리카락에 헤어롤이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찬바람이 불며언~~"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아는 '찬바람이 불면'의 목소리가 아닌 걸 보니 누군가가 리메이크한 것 같았다. 누구지? 하며 집중해서 듣고 있으려니(그 상황에서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으니까) 느닷없이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가끔씩 가수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이 순간처럼 도입부의 한 소절 만으로도 순식간에 장면을 바꿔버릴 때이다. 도입부의 멜로디와 그 속에 담긴 가사와 부르는 이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맞아들 때 그곳은 순식간에 전혀 다른 곳이 되며 미처 깨닫지 못한 서사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아주 창피하게도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면... 을 듣는 순간 눈물이 고여버려 애를 먹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족장 딸처럼 보이고 싶다며 낄낄거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변덕스럽고 괴팍하며 좀 많이 이상한 변주곡도 아니고 말이다.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잊고 있던 그녀가 떠올랐다. 지난여름 내내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릴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직장은 도시 외곽에 있어 출퇴근을 위해 매일 같이 왕복 60km를 운전했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 속을 달리다 보면 마치 물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기 보단 물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호흡이 가빠오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런 계절이 조금 더 지속된다면 아가미가 생겨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였다. 주변은 온통 숨 막히는 일들 뿐이라 차라리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여름이었기에, 그녀는 내심 이 지독하고 지루한 비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비 오는 도로 위를 달리곤 했다.
그녀는 왜 숨 막혀했던 걸까. 이유를 찾지 못 한 채 내 생각은 늘 거기에서 멈췄고 어느덧 그 계절이 끝나버려 한동안 그녀를 잊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빗속을 달리고 있을까. 숨 막히는 현실을 바라보다 지쳐 차라리 물속에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나아가길 바랄까. 여전히 아가미로 호흡하길 원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다.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라고 그녀가 내게 말하는 듯했다.
잠시 쓰는 일을 잊었다. 어차피 뭔가를 쓰지도 못할 텐데, 하는 생각에 읽는 일도 쓰는 일도 다 외면했다. 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에 '곧 출발인 여행을 다녀온 후 쓰고 싶어지면 그때'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찬바람이 부니까, 이제 곧 출발이니까, 그녀가 떠나기 전에, 그녀가 아주 잊히기 전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줘야 하나. 미용실 의자에 앉아 족장 딸 머리를 하는 내내 그녀를 떠올렸다.
보라카이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이 프리다이빙을 배우는 것인데 숨이 많이 가쁠 것 것 같다. 난 물속이 거의 처음이라 벌써부터 몹시 겁이 나는데 물속에서 숨을 멈추며 그녀를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는 무엇인지, 그녀에겐 어떤 이름이 어울리는지, 숨이 막히는 느낌은 어떤 느낌인지, 그건 슬픔인지 혹은 기쁨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전혀 모르던 또 다른 감각인지. 그녀를 떠올리며 물속에 잠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조금 덜 두렵지 않을까.
어느덧 출발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족장 딸 머리를 하고선 몸에 맞지도 않는 수영복을 10벌이나 챙겨 들고, 드디어 떠난다.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 조금은 기대되고, 가봐야 아무것도 없을까 봐 조금은(사실 많이) 걱정되지만 일단은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