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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26. 2023

여름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지금보다 꽤 어렸던 시절. 거리 곳곳엔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맘 때면 그 리어카에선 크리스마스 캐럴이 크게 울렸다.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들 사이로 캐럴 소리가 넘실거렸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상점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반짝이는 빛을 뽐내기 시작하면 잔뜩 부푼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한 걸음 걷다가 저쪽을 향해 기웃거리고 또 한 걸음을 걷다가 그 너머를 향해 기웃거리길 반복하며 볼에 부딪히는 차가운 바람도 잊은 채 '우우우~와아아아~, 크리스마스다아아~~!!'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몇 년에 한 번씩 마치 기상이변처럼 눈이 내리는 곳이라 늘 궁금했던 것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며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아!!" 어릴 때 그 캐럴을 부르면서도 그 순간의 상쾌함에 대해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보단 '흰 눈사이로 썰매를 타며... 달릴까아~마알까~' 하던 영구 때문에 터트려지던 웃음이 훨씬 더 와닿았다. 낯설기만 한 눈 속을 달리는 상상보단 영구의 콩트 속에 담긴 웃음이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모두가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꿈꾸던 때였다. TV나 영화 속 연인들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어디서 만나자, 하는 약속을 주고받았으며 크리스마스 즈음의 통신사 광고에선 늘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배경이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은 왜 좀 더 특별하고 낭만적인 걸까. 어째서 다들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걸까? 크리스마스의 눈 속에 담긴 것들이 무언지 잘 몰랐기에 더 궁금했다.


아직까지도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겪어보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을 맞으며 새하얀 거리를 걷는 기분이 어떨지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다만, 더 이상은 어린 시절만큼의 설렘이 없는 것 같다. 달릴까아~마알까아~하던 영구의 콩트가 추억 속에 묻힌 것처럼, 더 이상은 거리에서 캐럴이 울리지 않게 된 것처럼, 그리하여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조금씩 옅어진 만큼, 화이트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도 이제는 제법 사라진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보라카이를 11월에 갔는데 이미 그때부터 여기저기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었다.

필리핀은 크리스마스에 진심이라서 뻥 좀 보태서 10월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는 글을 여러 후기에서 보았다. 막상 가보니 뻥 같은 거 안 보태고도 진짜로 그러한 거 같았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빛을 내고 있었고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 장식들이 흔하게 보였다.

화이트크리스마스도 겪어본 적 없지만 여름의 크리스마스 또한 겪어본 적이 없다. 그곳의 눈사람은 수영복을 입은 채 야자나무 옆에서 망고를 먹고 있으려나? 현지화된 눈사람과 루돌프를 상상하며 갔었는데 눈사람은 두꺼운 털모자를 쓴 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크리스마스트리는 눈에 덮여 있었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던 루돌프의 표정이 유난히 귀여웠다.

아들의 썬번으로 찾았던 병원 로비에조차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길래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이곳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 사람들은 당연히 눈을 본 적이 없을 테고 어쩌면 평생 눈을 겪어보지 못할 텐데... 눈에 대해선 어떤 느낌일까? 베일 듯 차가운 공기에 코가 시린 느낌도 모를 테고 목도리 같은 건 둘러본 적이 없을 텐데 이런 장식들을 할 때면 어떤 기분일까?"

"암튼 우리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즐기는 것 같아. "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일까? 눈의 차가움 혹은 포근함에 대해 어떤 환상을 지니고 있을까?

그곳에 있는 내내 그들의 크리스마스를 궁금해했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서 웃고 있던 눈사람과 알록달록 반짝이던 크리스마스트리.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 빨간 크리스마스 털모자를 쓴 식당 직원들과 그들의 어깨너머로 보이던 새파란 바다와 바람에 흔들리던 야자나무.

전혀 다른 두 계절이 서로에게 기대어 생경한 환상에 사로잡힌 모습을 며칠 내내 보다 보니 오래전에 잊었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여기도 크리스마스트리네? 눈사람도 같이 있네. 음...... 몰랐는데 참 예쁘네,라는 말들을 꼬박꼬박 중얼거리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헤난프라임은 해변과 식당이 바로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 머물던 어느 저녁에 남편과 식당을 찾았다. 선베드에(식당 바로 앞이 해변이라 입구에 선베드가 있다) 나란히 누워 산미구엘을 마셨다. 식당 한편에선 디너쇼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작은 규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던 가수들이 크리스마스 관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화이트비치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로 쭉 뻗어있던 야자나무를 가볍게 흔들었고 귓가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울렸다.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산미구엘 애플을 계속 마셨는데 그날 저녁의 산미구엘이 가장 맛있었던 거 같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멍해진 시선을 하고 있다가 산미구엘을 한 모금 더 삼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미쳤네. 나 지금 좀 많이 행복한 거 같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나를 건드리는 바람과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이 가득한 소리를 담기 위해 가만히 휴대폰을 들었다.


야자나무 아래서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바다를 바라보며 잊고 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다시금 품었다. 어쩌면 내내 환상 속에서만 내릴 눈일지라도 그런 꿈 자체가 행복이겠지. 크리스마스의 눈 속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의 'you'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이 있지 않을까. 살면서 이 정도의 환상쯤은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린다면...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말이다.


숙소 로비를 장식하고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좌) 페어웨이즈 (우) 헤난프라임
(좌) 디몰 안에 있던 호텔 정문 (우)화이트비치에 있던 스타벅스
마닐라 공항 곳곳의 크리스마스 장식
헤난프라임 식당 선베드에서 바라본 풍경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담고 싶었던 바람과 음악소리가 제대로 담기진 않았네 ㅠㅠ 산미구엘 애플만 가득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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