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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21. 2023

보라카이에선 무얼 입었나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가서 뭐 입지? 였다.

휴양지에선 다들 뭘 입지? 물놀이할 때는 래시가드를 입으면 되나?

그 곳의 기후는 대체 어느 정도로 덥거나 습한 걸까?

필리핀 여행룩, 비치웨어, 보라카이 날씨, 휴양지 옷차림, 해변 비키니 등등 다양한 검색어를 활용하며 무얼 입을지 고민했었다. 10년 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이자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게다가 '비키니는 기세다!' 라며 나이 사십이 넘어 난생 처음 비키니를 입을 결심까지 했던 터라 보라카이에서 무얼 입을 지에 대한 내 고민은 아주 진심이었고 꽤나 진지했다.


비키니밴더,하바나선데이, 언니비키, 메이비치, 발리비키

내가 진실로 매의 눈을 하고선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쇼핑몰들이다. 11월에 떠나는 여행을 위해 8월부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쇼핑에 공을 들였다. 10벌이 넘는 수영복과 4벌의 원피스, 3벌의 크롭티를 새로 구입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여름옷까지 더해져 결국 내 옷 때문에 24인치 캐리어를 하나 더 구입해야 했다. 정말로 이걸 다 입을 수 있냐고 재차 확인하는 남편에게 "사이즈가 안 맞는 것도 꽤 있긴 한데, 가서 열심히 놀다 보면 살이 빠져서 들어갈지도 몰라. 어쨌든 무조건 다 입을 거야."라고 대답하며 꾸역꾸역 짐 속에 챙겨 넣고 떠나왔다.


그리하여 보라카이에선 대체 무얼 입었나.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보라카이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숙소 침대에서 뒹굴던 시간 외엔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선 물놀이를 했다. 보라카이의 식당이나 카페 대부분은 수영복을 입은 채 가도 되었기에 바다에서 놀다가 밥을 먹으러 가거나 숙소로 돌아가 컵라면을 먹고 다시 수영장에서 놀았기에 사이즈가 맞지 않아 끝내 입지 못 했던 것을 빼곤 내내 수영복을 입고 지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물놀이였기에 과연 내가 좋아할까? 무서워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생각했던 거보다 너무너무 재밌었기에 젖은 수영복을 갈아입고 말려서 다시 입어가며 놀곤 했다. 아, 남편은 내가 본전을 찾을 생각에 '악착같이' 놀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정말이지 난 그저 진짜로 재밌었다. 본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튼 너무 재미 있어서 악착같이 놀았다. 


비키니는 기세다,라고 외치던 박나래가 멋져서 '나도 비키니를 입어야지' 결심했지만 사실 나로선 그저 기세만으로 입기 힘들었다. 박나래는 연예인이니 기세를 외치며 비키니를 입는 일 또한 근사한 콘텐츠가 될 수 있었겠지만, 내가 이 나이에 비키니를 입으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소시지 같은 배를 내려다보고 있을라치면 혼자서도 조금 부끄러워져 '굳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살을 좀 빼야 하는데' 싶기도 했다. (소시지는 진지한 주제다. 이건 쇼핑몰 후기를 봐도 자주 나오는 걱정이다. '소시지 같아 보일까 봐 걱정했지만 사이즈가 괜찮았어요'라든지, '수영복 색감이 미쳤어요, 덕분에 소시지 같지 않아요'라든지.)

쇼핑몰 후기를 보고 구입한 비키니를 입고선 "나 어때?"라고 남편에게 자주 물었다. 그럴 때마다 굳이 사팔뜨기 같은 눈동자를 하고선 잔뜩 두리번거리며 "뭐가?"라는 반응만 이어졌기에 괜스레 의기소침해져 뱃살튜브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비키니를 찾아 헤매길 반복했다. 

박나래 비키니를 검색하면 두 가지 비키니가 나온다. 나혼자 산다 비키니와 걸어서 환장속으로 비키니. 그녀가 '나 혼자 산다'에서 입었던 비키니는 새빨간 색상 때문인지 나한텐 너무 화려한 느낌이었지만,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에서 입었던 비키니 정도는 어쩌면 나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가 입었던 것과 같은 제품을 면세로 주문하여 공항에서 수령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스타일의(상하의가 모두 길거나 스포츠 브라 형태로 활동하기 편한 비키니) 수영복을 아주 잘 입고 다녔다.


보라카이 해변에선 대부분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외국 관광객은 체형과 관계없이 100이면 100 모두 비키니였다. 래시가드 혹은 잠수복 수준의 워터레깅스가 보인다 싶으면 한국 관광객이었다. 나 또한 두어 차례정도는 모노키니와 워터팬츠를 입었는데 그거야말로 한국인 인증을 위한 차림새였다. 아니, 내가 한국인이라 창피했다는 것이 아니고 뱃살 튜브를 내놓았을 때보다 사람들 눈에 더 띄는 느낌이어서 그게 좀 싫었달까. 보라카이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는 일엔 아주 약간의 기세조차도 필요 없었다. 그게 가장 무난한 차림이었기에 그저 내가 물놀이를 하기에 편한 정도의 비키니면, 놀다가 흘러내려 수치사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의 비키니면, 만사땡이었다. 바닷물이 나를 감싸며 알아서 자체 보정을 해주었고 내내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다녀 얼굴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수영복을 입는 일엔 거리낌이 없었다. 그저 몸에 맞는 옷을 끼어 입고는 신나게 놀면 되었다.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나 또한 수영복을 입고 있을 때 자유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무중력의 푸른 공간 속을 떠다니며 뜻밖의 나와 마주하였고 그러한 나를 진심으로 즐겼던 순간들이다.

"뭐야? 나, 물에서 노는 거 너무 좋아하잖아?"


문제...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사소한 곤란... 정도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나랑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해변이나 디몰에서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비키니를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비치원피스를 입고 있을 때면 꼭 저~~ 기에서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휴양지 옷을 파는 쇼핑몰은 제한적이었고 사람들의 취향은 대체로 비슷한지라 내가 산 옷을 남들도 샀던 것이다.

남편이 "어? 저 옷?" 하면, 어김없었다. 나랑 같은 옷이었다. 상대의 표정에도 곤혹스러움이 번졌다.

'괜찮아요, 안심해요. 내가 먼저 피해 줄게요.' 재빨리 눈빛을 보내곤 야자나무 뒤로 숨곤 했다.

'난 삼만삼천 원에 샀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싸게 샀으려나...' 따위를 궁금해하다가 가족들에게 "저 사람 지나가고 나면 말해줘"라는 부탁을 했다. 그럴 때면 눈치 없는 아들이 꼬박꼬박 "엄마랑 똑같은 옷 입은 사람이 있는 게 왜 그렇게 큰일이야? 그게 왜 창피해?"라고 큰소리로 묻기도 했다.

그러게. 그게 왜 그렇게 창피했을까. 어쨌든, 나의 소시지 혹은 뱃살튜브보단 같은 원피스 입은 사람을 마주했던 일이 훨씬 창피했다.


가져간 옷은 끝내 절반도 입지 못 했다. 크롭티는 아예 꺼내지도 못 했고 원피스도 두어 벌 입다가 말았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하는 남자 기안 84가 이번에는 마다가스카르를 갔던데, 여전히 단출하기만 한 그의 짐을 보니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가 결국 무게만 차지했던 내 짐들이 조금 부끄러웠다.

기세니 뭐니 했지만 실은 그 속에 허영이 있었음을 부인하진 못 하겠다. 고작 일주일을 위해 그렇게나 옷을 많이 샀던 이유는 날씬하고 예뻐 보이고 싶은 허영때문이었다. 비키니를 입고 싶었던 마음속엔 틀림없이 마흔다섯 살 같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을 테다. 그게 뭐 어때서? 좀 그러면 어때? 싶기도 하지만, 그저 기세로만 포장하려 했던 감춰진 속내가 살짝 우스운 것이다. 차라리 날씬하고 어려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라며 당당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 멀리에서 나랑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고 날씬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러니, "뭐가 그렇게 창피해? 엄마, 왜 숨어?" 아들의 물음에 대한 답은 끝내 속으로만 삼킬 작정이다. 다만, 다음번 여행에서의 내 짐은 틀림없이 조금 간소해져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번보다 더 화려해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보단 조금 더 솔직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 가지로 뜻밖의 나를 많이 마주했던 여행이었다.

난생 처음 비키니를 입었고, 난생 처음 등이 훅 파인 원피스도 입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림의 나를 마주하며 스스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어봤는데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그저 애매한 비키니를 입은 아줌마로 보았겠지만, 나는 그저 여전히 탄탄하고 건강하고 날씬하고 예쁘고 싶은 나였을 뿐이었다. 보라카이에선 무얼 입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나의 뱃살과 나의 허영과 나의 젊음과 나의 나이듦과 그러한 나의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싶은 나, 그 자체를 입었다고 말하고 싶다.


다음번 여행에도 비키니만큼은 계속, 계속, 계속 꾸준히 입을 생각이다.

내 얼굴형과 적은 머리 숱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결국 아주 소심하게 시도한 머리딿기. 다음엔 좀 더 과감하게 해볼 생각이다.
이렇게 입고 다니자 똑같은 옷 입은 사람이 사라졌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모습. 옷도 그렇고 따악 뒷모습인 것도 그렇고.

+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이 차림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필리핀은 면세한도가 아주 빡빡해서 면세점에선 비키니밴더의 수영복 몇 벌과 이 옷 정도를 구입했다. 100달러를 채워야 사은품을 받을 수 있어 별 기대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옷인데 너무 편해서 실제로 가장 자주 입었던 옷이다. 남편 역시 저 차림의 뒷모습을(앞모습 절대 아님) 가장 좋아했다. 내가 뱅그르르 앞으로 돌라치면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아니, 아니, 뒤..." 했던 걸 보면 그저 뒷모습이라서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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