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휴대폰에 3.5mm 이어폰 잭이 없어진 지 도대체 몇 년인가
어제는 옷방 한쪽에 쌓여있던 흰색 반팔티 무더기를 정리했습니다. 똑같은 색상의 비슷한 옷이지만, 정작 잘 입지도 않으면서 '핏이 좀 다르다', '프린팅이 같지 않다' 등의 이유로 막상 버리는 것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지난주 차를 바꾸고 나서 더 이상은 쓸모가 없어지진 무선 카팩을 버릴 때와는 결심의 시간도 오래 걸렸고, 고민의 밀도도 더 높았습니다.
어제 큼지막한(?) 결심을 한 번 했기 때문에,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좀 쉬운 결심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찾아보았습니다. 저희 집은 TV가 없습니다. 결혼 당시 2000년대 후반에 구매했던 PDP 42인치 LG TV가 2010년대 중후반 수명을 다 하고 나서 굳이 몇백만 원을 들여 '시간을 버리는 물건'을 들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TV가 없어서 생긴 좋은 점은 가족 간에 대화가 정말 극단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고, 퇴근 후의 시간이나 주말 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는 점, 그러다 보니 책을 많이 보게 되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반대로 단점을 찾자면, 소소한 부분에서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좀 늦게 알아채고는 합니다. 업무나 관심분야가 아닌 뉴스는 잘 찾아보지 않기도 하다 보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라던가, 최신 유행 아이돌 음악, 예능 프로그램, 이런 건 아무래도 좀 늦을 수밖에 없죠.
TV는 몇 년 전부터 사라졌지만, TV를 받치고 있던 TV장은 나지막한 수납장으로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TV 대신 그림 액자나 거울, 꽃병 몇 개를 받치고서, 아래 서랍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그대로 품고 있죠. 그러고 보니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이 TV 서랍장은 2010년대 초중반 처음으로 서울 서북부 지역에 살 적에 일산 쪽 인테리어 박람회에 갔다가 계약했던 가구네요. 이것도 벌써 10년이 되어 갑니다. 거실 가운데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TV 없는 TV 서랍장, 꽤 오래 같이 살고 있네요.
그 서랍장에는 이것저것 잔뜩 들어있습니다. 얼추 결혼한지도 15년 남짓 흘러, 이제는 어디 꺼내어 두기 조금 어색한 결혼사진 소액자들,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들, 나중에 유리 닦을 때 쓰려고 모아둔 신문지 등등 필요하지만 꺼내어 놓기 애매란 것들일 쌓여있죠. 오늘 아침에는 거기를 뒤적뒤적거리다가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휴대폰 셀카봉'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꽤 한창 유행이었는데 말이죠. 기억을 되짚어 보면,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시기 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전 폴더폰에도 카메라가 있기는 했지만, 그 핸드폰 모양 자체가 이렇게 봉 한쪽에 끼워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죠. 여기는 딱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큼지막한 화면을 가진 평평한 휴대폰이 쏙 들어갑니다. 봉을 길게 연장해서 멀리서도 찍을 수 있도록 3.5mm 이어폰 잭을 연결하면 봉 손잡이에 달린 버튼으로 카메라 셔터도 제어할 수 있는 편리한 제품이었죠.
원래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셀카를 그렇게 많이 찍지는 않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사실 이 제품을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어디 행사나 외부 회의 같은데 참석했을 때, 참가자 기념품 종이봉투에 들어있던 판촉물 정도인 것 같은데,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이걸 들고나간 기억은 전혀 없네요.
지금 아내와 제가 쓰고 있는 아이폰 모델 모두 3.5mm 이어폰 잭도 사실 없습니다. 저 셀카봉을 쓰고 싶어도 제대로 쓸 수도 없는 상황이죠. 그러고 보면 아이폰에서 이어폰 잭이 사라진 지도 벌써 몇 년 하고도 한참 지났습니다. 3.5mm 이어폰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에어팟 같은 고가의 제품이 아니라고 해도 qcy나 가성비 좋은 블루투스 이어폰들이 어지간한 유선 이어폰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하니 말이죠.
오늘의 물건을 버리는 결심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이제껏 쓴 적이 없고', '앞으로 쓸 수도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죠. 버릴만한 물건을 찾는 것, 삶의 무게를 덜어낼 만한 부분을 찾는 것이 어떤 날은 어렵고, 고민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보자마자 쉽게 결심이 서는 날도 있네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에 떠오릅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어떤 초콜릿을 집을지 아무도 모른다(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 are going to get)"는 대사였죠. 오늘은 쉽게 버릴만한 물건을 하나 찾았는데, 내일, 그리고 다음 주는 또 어떤 물건을 찾게 될지 궁금합니다. 결혼하고 집을 꾸리고 산지 벌써 1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이 집구석구석에는 제가 모르는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는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