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첫 디지털카메라'를 버립니다.

캐논 파워샷 A75, 2000년대 초중반 싸이월드의 추억

by jim

이제 시간이 날 때마다 물건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한 지, 몇 주, 한 달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단 가장 버리기 쉬운 것은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물건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컴퓨터에 MP3를 저장하거나 구매해서 듣지 않는 지금, 지난주에 버렸던 '아이팟 나노'는 더 이상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물건이었죠. 유선 이어폰도 없고, 널찍한 모양의 예전 아이팟/아이폰 연결 케이블도 없고요.



생각보다 버리기 어려웠던 것 들은 쓸 수는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안 쓰는, 즉 '쓸모가 없는 물건' 들이었습니다. 유행이 지나거나, 색이 바랜 옷가지들이 대표적이겠죠. 입을 일이 전혀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최근 몇 년 동안 입은 적도 사실 없는데, 그렇다고 기능을 다한 것 같지도 않고, 하다못해 집에서 잠옷으로 입거나, 버리기 전에 걸레로라도 한 번 쓸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이런 물건들을 버릴 때에는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보물 같은 물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려 저의 인생 최초의 디지털카메라였죠. 2000년대 초반, 저의 대학시절 무렵이 아마 '디지털카메라'라는 것이 일반인의 손에도 들려지기 시작한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복치 못한 어린 시절의 카메라는 평소에 부모님이 잘 모셔두고 있다가, 소풍이나 무슨 큰일이 있을 때 '절대 잃어버리거나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과 함께 잠시 들고나갔다 오는 물건이었죠. 예전 카메라는 24방, 36방짜리 필름이라는 '제한'이 있어서 지금처럼 아무 사진이나 막 찍을 수도 없었습니다. 필름에 남겨진 사진을 실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뽑아서, 하나씩 나누어주는 인화와 현상 과정도 만만찮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과정이었죠.


백만 화소, 2백만 화소라는 적당한 성능의 디지털카메라들이 몇십만 원 수준의 나름 접근 가능한 가격대에 들어오면서 보통의 사람들도 이 물건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물건의 장점은, 한번 구매만 하면 사실상 추가 비용 없이 '사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죠. 예전의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는 필름을 구매하고, 사진을 인화 및 현상하는 모든 과정에서 비용이 들었지만, 디지털카메라는 처음에 장비와 메모리, 배터리, 충전기 등을 한번 준비만 하면 되는 아주 가성비 높은 제품이었습니다.


그래도 가격이 만만치는 않았죠. 필름 카메라의 감성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DSLR은 어지간한 중고차 한 대 값을 상회했고,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되어 있는 하이엔드급 장비들의 가격도 만만찮았습니다. 그러던 중 캐논의 파워샷 A 시리즈는 용돈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던 20대 초반도 한번 푼돈을 모아 도전해 볼 수 있는 그런 제품이었습니다.


아마 제 기억에 이 카메라를 구입했던 것이 2004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졸업 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었거든요. 여행에서 많은 사진을 찍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이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카메라를 여기저기 들고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쌓았었습니다. 이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작은 돈이지만 조금 벌이가 생기면서, 2007년 경에 적당한 DSLR을 한대 구매했고, 그걸 시작으로 이 작은 카메라는 점차 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죠.


2021년 지금, 제 인생의 첫 디지털카메라를 바라보면서 2000년대 초중반을 돌아보니 하나의 키워드가 머리를 스칩니다. 바로 '싸이월드' 더군요. 프로필 사진이 좌측 상단에 떠 있고, 직접 제목을 정한 이런저런 게시판과 앨범들에 글과 사진을 올려놓을 수 있는 일종의 소셜미디어이자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였습니다. 그 당시는 최첨단이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레트로 감성이 넘치는 서비스네요. 아마 적당한 나이대의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싸이월드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2000년대, 아마 싸이월드의 유행도 디지털카메라의 대중화에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카메라는 선뜻 '버릴 물건'으로 고르기가 쉽지 않더군요. 나름 많은 추억과 손때가 묻어있는 물건이어서 그럴 겁니다. 그런데 사실 '추억'은 '사진'이지, 이 기계가 아닌데 말이죠. 가만히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작동은 하는지 전원 버튼을 눌러보았습니다. 배터리가 비어있더군요. 다행히 전용 충전 배터리가 아니라 AA 배터리도 들어가는 것이어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배터리들을 모아 켜 보았습니다. 잘 작동되더군요. 메모리카드가 없어서 사진 저장이 안 되길래, 서랍 깊숙이 처박혀있던 큼지막한 CF카드 256M짜리를 끼워 넣어 보았습니다. 잘 저장이 되었습니다. 찍힌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는데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지금 스마폰은 손가락 한번 휘두르면 마치 해리포터의 마술봉처럼 수백 장의 사진이 휘리릭 넘어가는데 말이죠.


당시만 해도 디지털카메라의 '급'을 메길 때, '몇만 화소'가 중요했습니다. 이 카메라는 3백만 화소더군요. 풀 HD 화면이 1920x1080이니 2백만 화소 정도 됩니다. 풀 HD TV 화면을 캡처한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는 이야기죠. 2년 전에 구매해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전후면에 3개의 카메라가 달려있고 1,200만 화소라고 합니다. 이걸 비교해보고 나니 이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를 이제 그만 정리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느리고, 더 화질도 안 좋은데, 더 크고, 더 무거운' 물건을 절대 쓸 일이 없기 때문이죠.


어디 어린 친구들이나 조카 선물로 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도 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고, 그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이 물건을 준다고 좋아할 것 같지도 않더군요. 괜히 버릴 물건 주는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고요.


이 물건을 보면서 잠시 20년, 15년 전으로 돌아가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유럽 배낭여행부터, 지금의 아내와 여기저기 데이트하면서 사진 찍었던 추억들, 외장하드에 날짜와 장소를 매겨가며 사진을 정리한 뒤 몇 장을 잘 골라서 싸이월드에 올리던 기억까지. 지금은 스마트폰에서 찍어서 바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엄청나게 빠른 시대가 된 것에 새삼 놀라움도 들더군요.


이렇게 변해가는 시대에 맞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물건을 오늘 또 이렇게 하나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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