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찍찍이
하나씩 버려나가다 보니 '작동은 되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물건들을 찾아내는데 가속도가 붙습니다. 오늘은 어제 버렸던 싸이월드 시절 3백만 화소짜리 제 생애 첫 디지털카메라 옆에 있던 '어학용 카세트'를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토익 문제집과 같은 어학교재를 사면 카세트테이프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모두가 다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일부 '앞서 나가는' 교재들은 테이프 없이 MP3 파일이 들어있는 CD를 동봉해주거나, 다운로드할 수 있는 주소를 동봉해주기도 했지만, MP3는 특정 구간을 바로바로 돌려가면서 듣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MP3의 작은 버튼들이 그런 세밀한 조작에 적합치도 않을뿐더러, 제품에 따라 파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제품으로 90년대를 강타한 포터블 음악 플레이어의 대명사인 '워크맨'도 있습니다. 음악 재생을 위해서 최적화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였습니다. 디자인도 투박하지 않고, 예쁘게 잘 빠져있는 제품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버리는 이 어학용 카세트는 그것에 비해서는 조금 투박하고, 버튼도 외부로 돌출되어 있고, 덩치도 제법 나가는 제품입니다.
이 제품은 음악을 듣기 위한 제품이라기보다, 카세트테이프의 특정 구간을 반복해서 듣고 원하는 조작을 바로바로 하기 위해 디자인되었습니다. 별명이 '찍찍이'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특정 단어나 문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듣다 보면 '찍찍' 소리가, 조금 길게 뒤로 감으면 '휘리릭' 소리가 났었던 기억이 납니다. 연필 굴러가고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득한 밤늦은 시각 도서관 한쪽에서 영어 듣기 공부를 하면서, 이 물건을 들고 헤드폰을 끼고 찍찍, 휘리릭 계속하고 있다가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면서 '딸각거리는 소리가 조금 커요'라는 메모지를 주고 갔던 낯 뜨거운 경험도 떠오릅니다. 헤드폰을 끼고 있는 저만 그 소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제 귀에 찍찍, 휘리릭 소리만 들리는 줄 알았지, 남들에게 딸각 거리는 버튼 조작 소리가 들리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어린 친구들은 어떻게 어학공부를 할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플레이어들에 몇 초 단위로 앞뒤로 움직이는 기능이 생긴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거면 사실 충분히 커버가 되겠더군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제품이나 기능, 애플리케이션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이 물건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쓸 데가 없더군요. 카세트테이프를 들어볼까 하기에, 집에 남아있는 카세트테이프가 없으니까요. 손때가 많이 남은 물건이지만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취미로 하는 스페인어 공부도 Duolingo와 같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하고, 영어나 외국어 듣기를 할 때는 팟캐스트나 유튜브, 넷플릭스로 하고, 크롬 브라우저에서 몇 가지 플러그인만 설치하면 대사 문장별로 끊어서 듣고 반복하기까지 가능하니 말입니다.
녹음 기능을 이용해 볼까 생각해 보아도, 스마트폰에 있는 녹음 기능이 훨씬 관리가 편리한데 굳이 이 물건을 쓸 일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쓸 수 있는 방도가 없더군요.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아직도 이 물건이 신품의 경우 10만 원 대, 중고의 경우 2~3만 원대에 거래가 간간히 되고 있더군요. 아직 이런 아날로그 제품을 쓸 수 있는 분야가 남아있나 봅니다. '중고나라에라도 올려서 팔아볼까' 싶다가, 그랬다가 다시 서랍으로 돌아가고, 기억 속에 잊히고, 그렇게 다음 집, 다다음 집 이사 때에도 계속 따라다닐 것만 같아 그냥 이제 그만 놓아주기로 했습니다.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정도로 머릿속도 복잡하기도 하고, 사실 누구 연락받고 만나고 할 시간도, 정신도 없거든요. 이런저런 요구사항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갖가지 문의사항을 처리하기에는 제 멘탈이 조금 바스락 거리기도 합니다. 물건이라도 하나씩 비우면서 마음을 비우고, 삶을 정리하면서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는 중인데,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드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오늘은 20년 전 사용하던 '어학용 카세트'를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