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몇 년 동안 쓴 적이 없으니까
또 토요일 아침이 왔습니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일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주말이 또 왔습니다. 물론 또 짧은 주말은 이렇게 지나고, 또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월요일이 오겠지만 말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무실에 잠깐 들려 어제 마무리를 다 하지 못한 일을 좀 보고 돌아왔는데도 아직 오전입니다. 어깨에 조금 피곤한 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밖에 나갔다 와서 다시 잠자리에 들기는 좀 어색합니다. 아내도 오전에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는데, 무어를 하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낼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던 중 일단 물을 한 잔 마시고, 이번 주말에는 어떤 불필요한 물건을 버려볼까 옷방 문을 열었습니다.
어릴 적, 고교시절부터 모자를 좋아했습니다. 결혼 당시에도 제법 적지 않은 수의 모자가 있었고요. 그래서 모자를 정리해둘 수 있는 수납장을 하나 마련해서 지금까지 십수 년 간 모자를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옷장 옆의 그 모자장이 눈에 띄더군요.
시간이 흐르면서 모자의 유행도 돌고 돕니다. 학창 시절에는 작은 말 한 마리가 올라가 있는 폴로 랄프 로렌 모자가 유행이었죠. 그때 즈음에는 캥거루가 그려진 조금 폭신폭신한 느낌의 캉골 벙거지도 유행을 했었습니다. 조금 스포티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작 미국에는 없는 브랜드인)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로고가 들어간 MLB 모자도 제법 인기가 있었죠.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는 야구모자를 쓸 때 모자챙을 예쁘게 모양을 잡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즈음일까요. 외국 뮤직비디오 느낌을 가져온 이효리, 비 등 당시 영향력 있는 가수들이 소위 '트러커'라고 부르는, 모자 뒤판이 메시 소재로 되어있는 모자를 '힙'하게 쓰고 등장합니다. 모자 안쪽에 두건을 두르기도 했고요. 얼마 전에 '나 혼자 산다'에도 나왔던 개그우먼 이은지의 부캐 '길은지'의 느낌이 그 느낌이죠. '본더치'라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브랜드의 모자가 대표적인 트러커 캡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2000년대 초반이 되니 외국을 시작으로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평평한 모자챙에 조금은 오버사이즈 느낌의 모자를 '걸치고' 나옵니다. 전면의 로고도 과할 정도로 크기도 하고 디자인도 다양해졌습니다. 소위 '뉴에라'라는 모자였죠. 이때쯤부터 우리나라에도 모자를 메인으로 한 대중적인 멀티숍 프랜차이즈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적당한 모자 하나에 2~3만 원 대였다면, 이때부터는 괜찮은 모자 하나가 5만 원이 훌쩍 넘기 시작합니다. 평평한 챙, 넉넉한 사이즈, 새것임을 티를 내기 위해 떼지 않은 각종 스티커. 처음에는 힙합스타들, 연예인들, 보통 젊은 친구들로 조금씩 넘어가다가, 언제부턴가 대부분이 사람이 쓰는 보통 모자가 이런 스타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다시 로고가 작은, 살짝 챙을 굽혀 쓰는, 약간 '힘 뺀' 듯한 모자가 다시 유행입니다. 90년대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고 할까요. 저도 요새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폴로 캡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골프 모자만 하더라도 작년, 재작년까지 모델은 대부분 로고가 투어프로 선수들처럼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는데, 요즘은 폴로 캡 마냥 보일 듯 말 듯 작게 적힌 모델이 신상품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모자만 보더라도 유행이 돌고 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10~20대 어린 친구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툭툭 떨어지는 오버핏, 복고풍 느낌의 셔츠 칼라 형태 등을 보면서 어린 시절 보았던 어머니, 아버지의 젊은 시절 앨범이 떠오릅니다.
수십 개의 모자를 널어놓고 정리하면서,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뉴에라나 골프모자, 야구모자, 폴로 캡 등은 아직 버릴 결심을 하지 못했습니다. 살다 보면 또 유행이 돌고 돌 것 같아 깨끗한 좋은 모자들을 버리기는 어렵더군요. 헌팅캡 같은 것들도 한두 개는 있어야 편하게 쓰고 다닐 수도 있고 해서 한두 개 남겨놓고, 이런저런 핑계로 사실 거의 정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버리기로 한쪽에 쌓여있는 모자들을 보니, 어디서 기념품으로 받아오거나, 기념품으로 샀던 것들이 대부분이네요. 크루즈 여행 시에 분위기 내 보려고 근처에서 저렴하게 구입했던 선장 모자, 야외활동에 막 쓰고 다니려고 들였던 밀리터리 카모플라주 캡, 아마 안 쓴 지 10년도 훨씬 지난 페도라, 여기저기서 홍보물로 주었던 기관 마크가 찍혀있는 모자 등등. 그래도 개수가 제법 되기는 합니다.
확실히 버리기로 한 모자들은 최소 지난 5~10년 동안 쓴 적이 없는 모자들입니다. 공짜니까 받아오고, 싸니까 샀던 물건들은 확실히 사용하지 않게 되더군요. 이렇게 우리는 불필요한 물건을, 그러니까 결국은 쓰레기가 될 것들을 공짜니까 받아오고, 싸다고 돈을 주고 사고는 합니다. 평상시 쓰고 다니는 모자의 수에 비해, 아직도 많이 쌓여있는 모자 수납장을 보면서, 조금 더 '버리기 레벨'이 '업'되었을 때, 다시 도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