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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 Jul 17. 2021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극작가의한 편의극과 같은 장편소설

 부담 없어 보이는 '적당히 대충 그린' 표지 일러스트 덕분이었을 까요, 한여름 밤 배 깔고 누워서 선풍기 바람 쐬며 읽었던 만화책처럼 쉽게 쉽게 금방금방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시골마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소설에서는 다차원적인 구조가 이제는 기본 세팅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이야기와, 그 뒤를 쫓는 현재의 이야기가 시간 차를 두고 얽혀있다거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만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이 책의 주인공은 무료한 시골생활 속에서 우연하게 과거에 벌어졌던 실종사건의 뒤를 추적하면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다양한 사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내용 이야기는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반전 드라마가 다 그렇지만, 끝을 알고 보면 그렇게 심심한 것도 없으니까요.


 같은 날 사라졌던 네 명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스릴러물 느낌도 있고, 탐정물의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배경은 시골마을, 주인공은 20대 초반 운동복 차림의 삼수생, 고등학생, 할머니, 그리고 각종 조연은 동네 바보 등. 어떻게 보면 가족용으로 만든 한국영화 같은 느낌입니다. 적당한 재미, 적당한 편안함, 적당한 웃음, 적당한 진지함, 적당한 감동.


 아마 극작가가 적은 글이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드라마 연애시대, 얼렁뚱땅 흥신소, 화이트 크리스마스, 난폭한 로맨스 등을 적으셨다고 합니다. 20년쯤 전에 김하늘 주연의 동갑내기 과외하기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지만,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이 소설에서도 '극'의 느낌이 묻어납니다. 한 편의 영화나 TV 드라마를 본 것 같달까요. 확실히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보다는 시각적 묘사가 사뭇 달랐고, 극의 기승전결을 위한 장치들이 익숙했습니다.


 재미있게 여유롭게 주말이 읽기 부담 없는 글이었습니다. 뭐가 남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설책을 읽을 때까지 꼭 무어를 남겨야 할까요. 다른 여성작가의 글에 비해 많이 남녀차별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쭉 읽기는 했는데, 다시 한번 돌이켜 보니, 결국 여성 주인공들 사이에서 남성이 폭력, 도피, 무책임, 불합리, 무능함의 주체이고, 여성이 피해자이면서 해결사라는 것이 깔려있기는 했네요. 동네 바보도 한몫을 한 것 같고요. 그러고 보면 요즘 사회 문제로도 관심이 많은 성대결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게 문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외롭고 괴로운 남성의 삶을 다룬 글이 있는지도 좀 찾아보고 싶네요.




21.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무척 길다.


23.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은 한없이 더디게 간다.


31. 시간이란 건 의식하면 할수록 더디 간다.


35. 그러게 처음 맞았을 때 지랄을 떨었어야 했다. 매 맞는 아내든, 매 맞는 손녀든 첫 번째 대응이 중요한 거다.


55. 잠이 드는 순간의 이미지는 꿀과 같다. 찐득한 꿀을 한 숟가락 펐을 때, 꿀이 줄줄 흐르다가 점점 가늘어지고, 나중에는 똑똑 방울져 떨어지다가 마침내 끊기는 것, 정신은 그렇게 아득해지는데...


103. "기운은 샘물이랑 똑같은 거여. 쓰면 쓸수록 솟는 거구, 안 쓰면 마르는 거구."


112. 그러고 보니 마당쇠가 허구한 날 빗자루 들고 마당에서 서성댄 건 마당을 쓸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초인종이었던 거다.


185. 이 늙은 사람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기였고, 어린 동생이었고, 사랑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나도 이렇게 늙어갈 것이다.


271. 평범하게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괜히 부모 잘못 만나 이쁘게 태어났어봐. 얼레벌레 연예인이라도 됐다가는 맨날 이 짓을 당했을 거 아닌가. 끔찍해라.


297. 삼수생이니까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는 거지. 남들보다 세 배나 더 공부한 사람인데.


320. "그럼 어떤 헌다니? 죽는 날까지는 살 걱정을 해야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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