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저냥 세상 사는 이야기①
그리 춥지 않았던 올겨울 언젠가의 일이다. 꿈에서 그 친구가 나왔다. 거의 15년 만이다.
친구는 나와 대학 동기였다. 둘 다 재수를 했기 때문에 동기들이 우리를 오빠언니, 형누나로 불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개강하고 첫 수업인 러시아어 전필 수업에서 친구를 처음 봤다. 숨 막히게 어색했던 강의실 분위기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었는지 1학년 때 나는 학교를 잘 가지 않았다. 술 먹을 일이 있을 때만 오후 느지막하게 학교를 등교하곤 했다.(방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나완 달리 친구는 성실히 학교를 다녔는데 과생활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접점이 많으래야 많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일 년 후에 나는 프랑스어문학과를, 친구는 러시아어문학과를 선택해 버리면서 과마저도 갈려 버렸다. 2학년 때 우리 사이는 너무나도 뻔했다. 3층 복도나 매점을 오가면서 종종 마주쳤을 테고, 실없는 안부 인사를 나눴을 테고, 서로의 몇 마디 푸념을 영혼 없이 들어줬을 테다. 그러다 그해 여름 난 입대했다.
복학을 하고 나서부터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때 친구는 이미 졸업을 했을 수도 혹은 4학년쯤 되어 학교를 드문드문 나와 마주치지 못했을 수도. 이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로 연락한 적도, 굳이 번잡스럽게 찾아본 적도 없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아마 싸이월드로 기억한다. 친구가 내 방명록에 시시콜콜한 글을 달아줬던 것 같다.
"아아,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데 너희는 몰랐겠지만 나는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벚꽃이 만개한 4월 어느 날 내가 강의실 뒤에서 고백을 했지만 멋스럽게 차였어요" 식의 달달한 전개는 전혀 아니다. 우린 그냥 적당히 아는 동기 사이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면 '적당히 아는'이라는 표현도 조심스럽다. 사회생활을 하고 대인관계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된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냥 잠깐 스쳐 지났던 사이에 불과했다. 그땐 어려서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모든 친구들이 다 소중하고 각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글쎄.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잔인하리만큼 세월이 흘렀고, 잔인하리만큼 감정도 굳어 버렸다.
그런 친구였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내 꿈을 찾아왔다. 신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반가웠다. 정말 반가웠다. 그런데 꿈에 나왔다는 사실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친구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21살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린 학교 정문 앞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별 내용 아니었을 거다.
친구가 새내기 1학년 얼굴로 등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때 이후로 만나지도, 사진조차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은 건데 꿈에서는 새로운 장소도, 새로운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오롯이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게 보면 친구의 이 모습은 당연하다. 마지막 기억이 그때쯤이니까.
꿈에서 깨고 나서 나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나왔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꿈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고마웠다.
친구는 현실에 찌들어 걱정 많고 고민 많은 나와는 달랐다. 꿈 많은 신입생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청춘을 분명 즐기고 있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아름답게 추억 속으로만 간직했어야 했다는 말인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친구를 앞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길에서 짧게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만나지 않을 사이라면, 어차피 멀어진 관계라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친구라면 그냥 지금처럼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과거형으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어찌 이 친구뿐일까. 다른 여자 동기들, 06선배들, 누나들, 후배들, 아니 형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과방 304호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던 밝은 모습으로만 간직하고 싶다. 무서운 건 일절 없고, 언제나 당당하고 총명한 그 모습 그대로.
날이 꽤 덥다. 서른여섯 번째로 맞는 여름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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