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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돌고래 Oct 16. 2017

개굴아이의 호기심 천국 서식기

나이가 서른인데 그동안 지나온 직장 수가 (아아아)

호기심 천국에 산다


호기심 천국에 산다. 이 다이나믹한 세상에서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서른 해를 지났다. 마음 가는대로 살다 보니 저지른 일은 많은데 끝장을 본 일은 전무하다.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수년 동안 고민했지만 뚜렷한 출발점을 찾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다. 또래보다 어딘가 덜 점잖았고, 질문은 더 많았고, 그 궁금증에 못 이겨 늘 사고를 치고 다녔다. 땅에 떨어진 음식이 건강에 좋을지 궁금해 멀쩡한 캐러멜을 바닥에 떨궜다 주워 먹는가 하면, 소금이 수분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죄 없는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갑자기 음악을 한다고?


대한민국 공교육의 기에 눌렸던 호기심은 성인이 될 무렵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평범하게 공부만 하다가 돌연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피아노는 꽤 오래 쳤지만,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워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기껏 해봐야 학교 밴드 정도가 다였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데모 CD와 손수 그린 악보를 들고 한 전문가를 찾아갔다 (실명은 창피해서 밝히지 않는다). 공연장에서 매니저를 통해 데모를 전달했는데 운이 좋아 연락이 닿았다. 작업실에서 그분을 만났고 ‘음악을 계속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섣불리 용기가 나진 않았지만.


고3이 되던 겨울, 친구를 따라 어느 밴드의 콘서트에 놀러갔다. 넓지 않은 무대 위에서 멤버들이 각자의 파트를 연주하며 따로 또 같이 공기의 흐름을 이끌었다. 일하면서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두어 시간이나 되었을까. 음악에 대한 호기심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음악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고 고등학교 마지막 해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보냈다.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음대에 지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말 그대로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어느날 갑자기 음악인이 됐다.


홍대에 처음 발을 들인 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그러나 음악을 하고 싶은 오빠들과 밴드를 시작했다. 당시 그들은 20대 후반이었는데 낮에는 일용직으로 일하고 밤에는 합주를 했다. 지금은 사라진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며 공연도 했다.


즐거웠지만 그뿐이었다. 밴드도 음대도 오래 가진 못했다. 여러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호기심이 사그라들었다. 2년 만에 학교를 떠나 놀이공원에서 일했다. 게이트 너머 모험과 신비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10개월 동안 백스테이지의 일원이 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특별한 날에 머물렀다. 삶의 방향성을 바꿀 만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만 즐거운 삶보다는 남과 같이 즐거운 삶을 지향하게 되었고, 어떤 일을 하든 타인의 일상에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졸업해도 답이 없는 인문대


음대를 떠나 대학을 다시 갔다. 졸업해도 답이 없다는 인문대였다. 학교에는 어너코드(honor code)라는 전통이 있었다. 학기말 시험을 자율적으로 보는 제도다. 정해진 기간에 아무 때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기가 나보다 며칠 뒤에 시험을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부정행위가 거의 없었다. 답해줄 사람도 없었지만 다들 자존심이 강해 물어볼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치열한 경쟁판에서 매일 한계에 부딪혔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이미 한 번 그만둔 전적이 있어 그러지 못했다. 


대학에서 지식이 아닌 마인드컨트롤 하는 법을 배웠다.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소신껏 살아내는 법, 주변인에게 자격지심 느끼지 않고 개인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 그런 것들을 배웠다. 사회생활을 하며 이런 기술들이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네’라고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난이도가 높아져서 웬만한 일에는 감정적으로 휘청거리지 않는다.


대학 생활을 하며 ‘지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좋은 학교에 다녔고 동기들도 평균 이상으로 똑똑했다. 글로벌 리더를 양성해내는 듯한 곳에서 지성의 양면성과 이기를 발견했던 것 같다. 어렴풋하게나마 지식과 지성의 차이를 알게 됐고, 포용할 줄 모르는 지성을 경계하게 됐다. 그에 대한 글이 모 일간지 대학생 칼럼으로 선정되어 (지금은 여러 매체에서 기자로 활약 중인) 멋진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대졸 후 시작된 본격 유랑


우여곡절 끝에 대학과정을 완주했다. 졸업 후 첫 직업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인디밴드의 객원 세션이었다. 아주 잠시 발을 담갔다 뺀 홍대에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하며 취미로 성인밴드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뮤지션 커뮤니티 구인구직 게시판을 뒤지다 어느 밴드에 지원했다. 취미 밴드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프로를 지향하는 밴드였다 (그리고 지금은 꽤 잘나가는 밴드가 되었다). 한 달에 며칠 빼고 거의 매일 공연을 했던 것 같다. 공연자가 세 명인데 관객이 두 명인 웃지 못할 날도 있었지만 작은 공간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이 찾아온 날도 있었다. 아주 적은 액수였지만 돈도 벌긴 벌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청소년 센터에 취직했다. 놀 거리가 마땅치 않은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센터였다. 공연문화가 없는 동네였는데 매주 공연을 올렸다. 인근 청소년들이 실력 있는 뮤지션들의 공연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학교에서 벌점을 많이 받은 학생들과 특별교육도 진행했다. 태어나 처음 제안서를 써봤고 보조금 통장을 개설해봤고 클라우드펀딩을 열어봤다. 


사회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악재를 경험한 후 서울시 산하 어느 기관의 영상제작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촬영을 다니며 가치 중심의 삶을 지향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스스로 세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혹은 온몸으로 체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권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자발적 이탈이라니! 조화가 가득한 정원에서 생화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죽 호기심이 많았으면 이렇게 남들과 다른 길을 가나’ 싶어 묘한 동질감도 느꼈다.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에는 안정으로 얻을 수 없는 생명력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펄떡펄떡 뛰는 듯한 삶을 관찰하며 노동을 대하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어떤 일을 하게 되든 호기심을 따라서, 최소한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을 할 것.


기준에 충실해 발을 들인 곳이 문화기획사다. 큰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차 상관없이 해볼 수 있는 일이 많았고, 근무 기간 대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수 있었다. 여러 날밤을 준비한 것들이 현장에 구현되는 걸 보며 보람도 느꼈다. 몸은 피곤했지만, 행사 당일 들뜬 사람들 틈에서 덩달아 에너지를 얻었던 것 같다. 같이 일했던 사수가 ‘우리는 사람들의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말을 했었다. 오프라인 행사가 UX 디자인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출근이 좋을 만큼 즐겁게 일했다. 



회사 마저 그만뒀다


2016년 4월, 적절한 시기에 회사를 그만뒀다. 공간 제약 없이 일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퇴사하면 굶어 죽을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새로운 일을 하기도 했고, 꾸준히 온라인상에 기고했던 글을 보고 오퍼가 들어오기도 했다. 퇴사 후에도 회사에 다닐 때 이상으로 돈을 벌었다. 주로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디지털노마드가 나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 한 달 동안 에콰도르에 머물기도 했다. 매일 정해놓은 시간 동안은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어느 날은 서핑을 했고, 어느 날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요가를 했고, 어느 날은 산꼭대기에 있는 그네를 탔다.


에콰도르에서의 경험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싶었고, 이 일을 오래 하려면 특기가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하나로 묶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기왕이면 그 자체가 업이 될 수도 있을만한 것으로. 


퇴사 후 1년 동안 일복에 겨워 살았다. 프리랜서로 살며 들어오는 일을 사양한다는 건 나로서는 굉장한 결심이었다. 특기를 장착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하던 일을 모두 정리했다. 물론 불안하기도 했지만 ‘특기가 있으면 더 재밌는 일들을 많이 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절간에 들어앉는 심정으로 어느 학원에 다니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배우며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 하는 중이다. 


호기심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 못다 적은 호기심의 흔적이 많다. 아르바이트도 주유소부터 고액과외까지 다양하게 했다. 치맛바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고액과외를 했고 어릴 때부터 생계에 뛰어드는 친구들이 궁금해 주유소를 찾았다. 아, 물론 돈이 필요한 게 제일 컸다. 한 가지 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힘든데, 운이 좋아 여러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뭔가를 많이 한 것처럼 보일 테고, 누군가의 눈에는 깊이가 없어 보일 테다. 



세상 둘도 없는 개굴 아이


요즘은 매일이 낯설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문득 잘하고 있는 건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영재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현대 미술의 거장 밈모 팔라피노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저는 화가란 그저 계속되는 작품활동을 통해서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이지 ‘좋은 화가’와 같은 목표를 정해놓고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인정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화가인 저의 예술이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은 꼬마 화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피카소처럼 되고 싶었지만 모든 화가는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단다. 어떤 화가가 되고 싶은지 목표를 가지는 건 좋단다. 하지만 결국 너는 너의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거장의 인터뷰를 여러 번 돌려보며 못 말리는 호기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호기심 천국에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야기가 많은 삶을 살았다. 앞으로도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



: 버클리음대와 웰즐리대학을 다녔습니다. 호기심 천국에 서식하며 세상 둘도 없는 개굴아이가 되었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부모님의 믿음을 산산조각내고 다양하게 삽질 중입니다. 요즘은 신기술을 장착하겠다며 학원에 갇혀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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