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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돌고래 Sep 21. 2021

할아버지의 유산

시간과 마음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이 아무리 물을 줘도 점점 시들었다.

"3일에 한 번, 물뿌리개 가득으로 두 번에서 세 번, 골고루 뿌려줘. 쓰레기통 위에 있는 건 다습하면 죽는 애니까 너무 많이 주지 말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바람이 안 통하면 내리쬐는 햇볕에 말라 죽을까봐 창문도 적당히 열어놓았는데, 어떻게 된 게 멀쩡했던 고무나무의 가지가 휘고 초록 잎은 은행잎처럼 노랗게 떨어졌다. 애플민트는 죽기 직전이었다.


    엄마는 계속 병원에 있었고, 연락도 잘되지 않았다. 마스크, 에너지 바, 물티슈, 안경, 약, 티셔츠, 바지 등. 식물에 물을 준 후에는 병원으로 필요한 물품을 날랐다. 별관 7층 웨스트 병동.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격리 치료하는 음압 병동이었다. 오랜 투석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할아버지가 결핵을 앓게 되었고, 엄마가 보호자로 함께 들어가 있었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바로 다음 날, 잠시 응급실에 삼촌과 교대를 해주러 간 길로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일반인이 갈 수 있는 곳은 병동의 문 앞까지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병동 어딘가, 3중 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병실에 있다. 병실마다 문 앞에 위생 도구들이 놓여있다. 출입이 제한되어 청소도 보호자가 직접 해야 하는 곳이다.


일반 병실 아님. 두드리지 마세요.


    벨도 없는 병동의 굳게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아무도 듣지 못한다. 조금 더 세게 두드리며 자동문 너머로 자리에 누가 없는지 살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간호사가 문을 열어준다.

"어떻게 오셨어요?"
"H 님 보호자요."
"네, 전달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집에서 주섬주섬 담아온 물건들을 건넨 후 병동에서 돌아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엄마에게 카톡을 보낸다. '엄마, 방금 물건 전달했어.'




    8월 13일. 그날도 나는 왜 식물이 계속 죽어가는지 의아해하며 물을 주었다. 물뿌리개 가득 한 번, 두 번, 세 번.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에 골고루 물을 뿌렸다. 활짝 열어둔 창문을 조금만 남겨둔 채 닫고, 엄마가 부탁한 물건을 챙겨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볼 수 있게 해준대. 빨리 와봐."


    '때가 온 건가'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아버지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을 추리고 혼잣말로 계속 연습했다. 할아버지를 볼 수는 없었다. 다른 환자들의 안전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도 규칙을 따라야 했다. 그래도 병원 측의 배려로 보호자가 한 명 더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워낙 위중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할 수 있게끔 해준 것이다.

    엄마가 병동에서 잠시 나왔다. 오랜만에 본 엄마는 몹시 지쳐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오늘 밤부터 누가 할아버지 옆에 있을 것인지' 두 사람을 정해야 했고, 엄마와 큰삼촌이 병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작은삼촌도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서운하겠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작은삼촌은 누나와 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가게 문단속을 하고 와야 하니까, 내일 아침 일찍 올게."
"삼촌, 혹시 새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잖아."
"아, 그렇지. 지금 가서 바로 문 닫고 새벽에라도 다시 오지 뭐."


    엄마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고, 우리는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큰삼촌은 새벽에 병실에 도착했다. 혹시 몰라 벨소리를 크게 켜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전화벨이 울렸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것 같아. 얼른 와."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할아버지 방금 하늘나라 가셨어.


    몇 분 차이였다. 우리집에서 병원까지는 정말 가까웠는데, '씻지 말고 그냥 올걸' 후회가 됐다. 안 씻고 갔어도 문밖에 있어야 했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같은 층에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할아버지와 큰삼촌과 엄마는 아직 병실에 있었고, 나는 문 앞에 앉아 다른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삼촌이 엄마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분들 아직 안 오셨나요?"
"지금 오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

    작은삼촌이 할머니를 모시고 도착했다. 큰삼촌과 엄마가 나오고, 작은삼촌과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을 때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니까.


    나와 사촌 동생 J는 유리벽 너머 할아버지의 병실 쪽을 계속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를 이송하겠다는 말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형 베드가 음압 병동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좁은 베드 위에 베드보다 더 작은 할아버지가 실려 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병실을 바로 비워야 했다. 짐꾸러미가 휠체어 위에 쌓여 나왔다. 기저귀, 물티슈, 환자들이 먹는 대용식, 그리고 그동안 간호사를 통해 엄마에게 전달해 주었던 이런저런 물건들이었다. 오늘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중 생의 마지막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구나. 




    장례가 시작됐다. 빈소 안내 스크린에 할아버지의 사진을 띄우기 위해 안내데스크에 가서 영정사진 스캔을 신청했다. 빈소 옆 스크린에 고인, 상주, 그리고 입관 및 발인 정보가 떴다. 배우자, 아들, 딸, 며느리, 손자, 그 다음으로 손녀인 내 이름도 있었다.

입관 08월 15일 18시 00분
발인 08월 16일 08시 00분
장지 용인


    빈소 앞에 상조회사 김팀장님에게 부탁드렸던 POP 스탠드가 섰다.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부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조금 더 부드럽게 써줄 수도 있었을 텐데, 문장이 다소 무례하게 느껴졌다. 다시 뽑아달라고 하면 유난스럽다고 생각할까봐 사촌 동생과 몇 마디 주고받고 말았다.


    할머니는 여 상주의 한복이 칙칙하고 별로라며 남자들만 상조회사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단정하게 각자 검은색 옷을 입자고 했다 - 막상 할머니는 한복을 입었지만. 상조회사에서 여 상주 한복을 여덟 벌이나 가져왔는데, 일곱 벌은 침실 옷장에 고이 걸렸다. 기본적인 준비는 끝난 것 같았다. 큰삼촌만 장례식장에 남고 집마다 장례 치를 채비를 하러 흩어졌다.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베란다를 들여다봤다.

"어머, 이게 웬일이니. 어머, 얘 왜 이러니. 네가 그래서 전화할 때마다 애가 닳았구나."
"그러니까. 엄마가 하라는 대로 물을 줬는데 이렇게 계속 시들더라니까."

    엄마는 죽어가던 식물들에 내가 주던 것보다 물을 듬뿍 주고 있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죽는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소심하게 물을 줬었나 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식물이 살아있었다.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쓰레기통 위의 아이도 무사했다.


    베란다 응급처치를 마친 엄마가 장롱에서 검은색 원피스를 꺼내주었다.

"혹시 몰라서 사놓은 거야. 이거 입어."

    원피스를 받아 입고, 어울리지 않는 흰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몇 주 동안 병원에 있던 엄마는 잠시 누워있다가 장례 예배 시간에 맞춰 오기로 했다. 우리집이 병원에서 제일 가까웠기 때문에 내가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여전히 큰삼촌뿐이었다. 그새 빈소 재단에 꽃장식과 영정사진이 올라가 있었고, 빈소 초입에는 헌화꽃이 준비되어 있었다.


    상조회사 김팀장님은 목소리가 크고, 몸짓은 그보다 더 크고, 어딘지 모르게 꽉 막혀 보이는 분이었다. 그녀가 골목대장 같은 기세로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다.

"상주분들 다 어디 계세요?"
"옷 갈아입고 필요한 것 챙기러 갔어요. 몇 시간 내로 올 거예요."

    그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나와 삼촌을 거의 꾸짖었다.

"조문을 받기 전에 상주가 고인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거예요. 일단 있는 분들만이라도 오세요."


    POP 스탠드에 적힌 '사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 이런 분이면 사절이라고 할 만하지.' 전통 장례인지 상조회사의 방식인지 근본은 모호하나 삼촌과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헌화를 하고 인사를 했다. 그 후 김팀장님의 한 말씀이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B 상조의 김팀장입니다. ......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장례 기간 함께 하겠습니다."

    장례 절차고 뭐고 그냥 본인 프로젝트의 킥오프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네네.'


    삼촌은 빈소를 지키고, 나는 빈소 앞 데스크에 나와 있었다. 배달오는 화환을 받고, 접견실로 갈 음식을 영수증과 확인하고, 조문객들을 기다렸다. 삼촌은 버건디 스트라이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이번에는 김팀장님의 사수로 보이는 이팀장님이 등장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얼른 검정 양말 신으세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검정 양말 없어요?"
"아, 지금 집사람이 가져오고 있어요. 거의 다 왔어요."

    이팀장님은 멈추지 않고 본인들이 판매하는 양말을 권했다. 삼촌이 계속 거절하자 그는 어디선가 양말을 가져와 뜯더니 상주석에 있는 삼촌에게 휙 던졌다.

"그냥 드릴게요. 얼른 신으세요."


    와, 뭐지. 원래 상조회사는 이런 건가. 아무리 본인들의 가이드가 있다고 해도 유족들의 의사와 마음을 먼저 살피고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 주는 게 상조회사의 역할 아닌가. 우리 가족들이 <장례지도사 101> 수업을 듣는 게 아닌데, 참. 삼촌도 불쾌했는지 장례 후에 가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평소였다면 화를 냈을 일이다.


    장례를 소란스럽게 치르고 싶지 않아서 부고를 많이 알리지 않았다. 가족들의 성향상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엄마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삼촌들도 정말 친한 친구들에게만 알렸고, 할아버지의 친구분들과 옛 동료분들, 그리고 교회에 알렸다. 나는 회사 팀장님,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예뻐했던 30년 지기 친구, 그리고 마침 점심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에게만 소식을 전했다.

    직계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지방에 있는 친척들도 속속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8남매였기 때문에 가족들이 단체 부고 문자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조문객이 많았다. 울고불고하는 장례식장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3년 가까이 투석을 받으셨고, 마지막에도 몇 주간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다들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문득 슬프다가, 그러다 슬픔이 가라앉고, 실감이 났다 안 났다 했다. 우리는 각자, 또 같이 서로 다른 슬픔의 진폭을 지나고 있었다.




    둘째 날은 할아버지 생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분들이 오셨다. 신발을 신고 벗는 속도가 더뎌질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찾아주신 것이다. 비록 회사는 망했지만, 할아버지는 꽤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이제는 다들 노인이 되었지만, 삶의 가장 활기찬 시기를 서로 부대끼며 함께 보냈을 것이다. 십수 년간 연락하지 않던 전 직장 동료의 장례식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물질적으로 이룬 것들보다, 그러한 말들이 큰 위로가 됐다.


    저녁에는 입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음압 병동에서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 입관 몇 시간 전부터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속이 울렁거렸다.


"장손 어딨어요?"

    상조회사 김팀장님이 사촌 동생 G를 찾기 시작했다. 염습실로 가는 길에 영정사진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빈소에 있던 영정사진을 꺼내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액자 주위에 있던 꽃들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영정사진을 든 G의 뒤로 직계가족과 친척들이 줄을 이었다. 거기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주 편안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할아버지 주위에 빙 둘러서자 장례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입관식이 진행됐다.


"고인이 되어도, 마지막까지 청각은 살아있다고 합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 따뜻할 수 있게, 여기 계신 분들 고인 주위를 돌면서 마지막으로 고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해주세요."

    천천히 한 사람씩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주 고요한 공간이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할아버지의 볼과 귀를 만지며 드디어 나도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동안 속에만 머금고 있던 말이었다.


할아버지, 나 많이 사랑해 줘서 고마워.


    장례사들이 겉에 입는 수의로 할아버지를 얼굴부터 차례차례 감싸 안았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하게 수의를 입은 할아버지 주변으로 꽃이 놓이고,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이 놓였다. 그걸 보는 마음이 편안하고 평온했다. 그렇게 잔잔하게 고인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입관 예배가 이어졌다. 부산스럽게 빈소에서 옮겨진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이번엔 예배당 앞에 놓였다. 어떤 분의 꿈에서 할아버지는 집을 짓고 있었다. 뭘 짓고 있는지 물으니, 새로 살 집을 짓고 있다고 했다. 우연인지 목사님이 할아버지의 삶을 건축에 비유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할아버지가 건축 헌금을 했기 때문이다. 갓 부임한 목회자가 할아버지의 삶을 면면히 살펴봤을 리는 없고, 교인 정보 정도를 들춰보았으리라.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연세가 꽤 드신 후에야 신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 믿음이 제대로 생겨나기도 전에 무슨 마음으로 건축 헌금을 했을까.

    종교와는 별개로 할아버지는 실제로 평생 집을 지으며 사셨다. 가족들 말에 의하면 나는 얼굴도 잘 모르는 할아버지의 사촌들까지 누구 하나 할아버지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질이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의 시작이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20년 가까이 외가 식구들과 왕래가 없던 옛 사위도 부고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을 정도니, 할아버지가 생전에 얼마나 진실하게 사람들과 교제했을지 상상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어르신들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수고하셨소" 했을 것이다.


    장지로 떠나기 전날 밤, 큰삼촌네 식구들과 함께 빈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냥,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공간에 머물고 싶었다. 사촌 동생들과 빈소 옆 응접실에 널브러졌다. 장례식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매점에서 빌린 얇은 매트리스에 누워 할아버지와의 작은 순간들을 기억해내고, 곱씹고, 다시 기억해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았던 게 생각났다. 그 기억이 너무 따뜻해서 할아버지한테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떠나고, 장지로 가는 사람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그 뒤를 쫓았다. 화장터에 너무 일찍 도착해 30분 정도 기다려야했다. 금세 우리 차례가 되었다. 운구차가 화장터 정문 앞에 서고, 할아버지의 관이 모습을 나타냈다. 가족들이 모인 고별실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의 관이 보였다. 화장 기계의 버튼이 눌리고 유리창이 불투명으로 바뀌었다.

    화장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유골을 받기 위해 수골실로 갔다. 드르륵 달그락,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골함에 유골을 모아 넣는 소리였을 것이다. 화장터 직원이 빼꼼 창구 유리를 올렸다.


"화장 과정에서 임플란트 의치가 나왔습니다. 가져가시겠습니까?"

    그렇지. 우리가 잇몸에 박는 그 작은 나사 하나도 죽을 때 못 가져가는데,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걸까. 허탈하고 허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났다.


    화장터에서 장지까지는 차로 이동해야 했다. 운구차는 서울로 돌아가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은 버스에 실렸다. 이번에는 추모공원에서 나온 의전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식순을 진행했다. '이 세계에는 절차가 정말 많구나.' 문득 외국 장례도 이렇게 복잡할지 궁금해졌다. 묘 안에 유골함을 내려놓고, 돌아가며 묵례를 했다.


"저는 의전관입니다. 많은 장례를 보게 되죠. 요즘 세태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시어른 영전에서 눈물을 흘리는 며느리들이 사실 많지는 않아요.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오늘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을 봐도 외숙모들과 할아버지가 일반적인 며느라와 시아버지 같지는 않았다. 외숙모와 할아버지는 서로 너무 좋아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모두가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의전관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미뉴에트가 흘러나오고 까마귀들이 울었다. 세 가지 소리가 뒤섞여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지금부터는 고인을 기억하는 추모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자주 산소에 찾아오셔서 고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묘의 문이 닫혔다. 해가 뜨거운 날이었다.


"자, 가족들은 고인 곁으로 조금 더 다가오세요."

    의전관의 안내에 따라 그늘 밖으로 나갔더니, 그가 축문을 읊기 시작했다.

"고인께서는 이제 막 가족 유택에 몸을 누이셨습니다. 바라건대 좋은 하늘빛을 따라 바람처럼 훨훨 가고 싶은 곳 다 가시고, 보고 싶은 것 다 보시고, 하늘에 올라 자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어, 영육 간의 건강과 하는 일마다의 무탈과 건승을 이끌어주시고, 성장하는 손주들이 믿음 가운데 지혜롭게 잘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각별히 생면부지의 남녀로 만나서 자식을 낳고 한평생 해로하다 홀로 남겨진 고인의 내자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다 고인 곁으로 갈 수 있도록, 고인께서 우리 가족 모두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굳건하게 지켜주소서."

    축문이 길어질수록 목 뒤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세상 시름 다 잊으시고, 남겨진 자손들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더이상 아프지 마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천하명당 이곳 유택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유교와 기독교가 이상하게 범벅된 범종교적 축문이었다.


    의전관이 퇴장하고 입관 예배에서 건축 비유를 들던 목사님이 등장했다.

"안타까운 것은 장례 예식이 점점, 이게 기독교식인지 아니면 제사를 지내는 건지 알 수 없게 돼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는 첫마디부터 격양된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이미 떠난 사람의 자리에서, 이 무슨 때아닌 이념 논쟁인가. 굳건한 신념은 존중하나, 그 신념에 위배되는 광경을 마주했다고 한들 '정말 남의 장지에서 저렇게 소음을 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목회자의 화가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냥 귀를 닫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이 놓인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아무 이유도 없이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그날은 할아버지 컨디션이 꽤 좋았다.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식당가에 가서 밥을 먹고, 백화점을 둘러봤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쇼핑하러 다닐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기력이 없을 때도 신발이나 모자를 직접 골라 쓸 만큼 멋쟁이였다.

    나는 쇼핑도 백화점도 좋아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우리가 같이 그곳을 돌아다닌다는 게 좋았다. 층층이 들러 크게 한 바퀴씩 돌다가,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바지도 하나 샀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침대에서 쉬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고, 할아버지는 그런 내 손등에 뽀뽀해주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젊었을 때는 워낙 대쪽 같아서 가족들이 어려워하기도 했지만, 늘 한 발자국 뒤에서 말없이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분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한결같이 나를 지켜봐 준다는 게 새삼스럽게 든든할 때가 있다. 내게는 그 누군가가 할아버지였다.


    발인이 끝나고 며칠 후, 할아버지가 일하셨던 기업을 검색해 봤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 해부터 중학생이 될 무렵까지가 할아버지 커리어의 전성기였는데, 놀랍게도 그 기간에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제일 많다.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 나의 주 양육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출근 전에 나와 같이 동네를 돌아주고, 그네를 밀어주고, 문방구에 데려가 주었다. 틈만 나면 집에 틀어박혀 쉬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자니, 그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나에게 마음을 쏟았는지 알겠다. 지금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바빴을 텐데도, '늘 거기 있었다'고 기억할 만큼 시간을 내주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혹은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근 10년간, 나는 시간을 내는 것에 굉장히 인색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나마 집이나 직장 근처로 찾아와주는 친구들을 가끔 만났을 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내 발로 다른 동네를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나로서는 몇 주간 일이 휘몰아치고 나면 며칠 정도 칩거해야 생활을 이어갈 에너지가 올라온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밤낮없이 일에 치여 사는 날들도 많았지만, 쉬는 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집에서 뒹굴뒹굴했다. 사람들과 함께 쉬는 법을 몰랐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용건 없는 만남의 쓸모를 얕잡고, 오랜만의 식사 자리조차 일로 여겼으며,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양 살아가는 게 쿨한 것이라고 착각했다. 실은 99%의 인간관계가 내 관심사 밖에 있었던 거고,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피해온 거면서.

    이렇듯 모든 게 내 중심인데도 불구하고 머물러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에 속아주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해 주고,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고, 만나기를 청해주었다. 그들이라고 삶이 쉬웠겠는가. 그들의 삶도 나의 삶만큼이나 격정적이었을 텐데, 없는 여유를 쪼개 기꺼이 나에게 나눠주었다.


    할아버지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겹쳐졌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기로, 시간을 내기로 했다. 사회생활 시작하고 처음 해보는 결심이었다. 상대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나도 상대에게 에너지를 나눠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지났다. 이전이라면 가지 않았을 회사 동료의 집들이에 다녀왔고, 몇 년간 만남을 미뤄오던 친구들을 만났고, 남처럼 지내던 사촌 동생들과 시간을 보냈다. 특히 단체 집들이의 경우, 동창회고 결혼식이고 나에게 의미 있는 자리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던 때에는 절대 가지 않았을 곳이다. 예전이라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런 시간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울타리 밖에 내팽개쳐 뒀던 인간관계를 삶 속으로 들이는 것


    그것이 할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유산이다.


  장례식장에서 누구도 할아버지의 업적을 말하지 않았다. 전부 인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생의 업적은 흐려지고 관계의 의미만 남는다. 할아버지가 내게 그렇듯,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면 좋겠다. 머무는 인연이든 시절의 인연이든, 한 번의 만남이라도 진실한 시간을 공유하게 되기를.


(아, 참고로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은 다시 잘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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