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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 Aug 0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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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 2008년 12월

국내 최대규모 민간항공사는 시력 교정술을 받은 자는 조종사를 지원할 수 없다는 제한사항을 없앴다.



- 2015년 9월

나는 처음으로 시력 교정술을 받은 사람이 항공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진로 선택


 중학교 시절, 대부분의 중학생이 그랬듯 진로에 대한 고민만 있을 뿐 막연히 뭘 해야 할지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단지 컴퓨터를 만지는 것에 소질을 보이며 관심을 보였던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지속해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떨쳐내고 있었다.


 어느 날, 컴퓨터 학원 선생님께서 헬기정비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어릴 적 아버지의 영향으로 `항공`이라는 분야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나는, 진학 조건이나 진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알아보니 군장학생 제도를 통하여,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받고 군에 입대하여 의무복무 기간보다 1~2년 긴 군 복무를 하게 되는 제도였다. 학과에 진학하여 헬기 조종사가 되는 방법도 있었으며, 당시에 정보가 부족했던 나는 막연히 `헬기 조종사가 된다면 민항기 조종사로 진로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전문학사 취득 과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학과였으며, 나름대로 보장된 진로와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렸고, 인기 있는 지방 학사과정 못지않은 경쟁률을 자랑했다. 나는 운 좋게도 어머니의 혜안으로 취득했던 자격증들이 모두 입학하는데 가산점으로 들어갔고, 수백명이 몰렸던 1차 수시(당시에도 1학기 수시 제도가 있었다.)에 6명을 선발했는데 덜컥 합격하게 되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기독교 제단이던 학교에 목사 추천서를 받기 위해 교회도 다녔었는데 그 것이 결국 가산점으로 이어졌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1차 수시에 합격했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은 학교생활을 보냈고, 09년 3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대학 생활은 치열했지만 알차고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전문학사 과정의 특성상 여유는 별로 없었고 1년은 산업기사와 실습, 2년은 군장학생이 선발 합격을 목표로 하여 2년을 보냈다. 매년 미션(?)처럼 주어졌던 과제는 갓 스물이 된 우리에게 쉬운 과제만은 아니었고, 나름의 노력을 통해 절반 이상의 학우들이 2년간의 2개의 대과제를 통과하여 한날한시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장학생 합격 후 부사관 입대 전, 3사관학교 시험을 응시할 기회가 있었다. 장교로 입대한다는 것은 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의 지름길이었으며, 나는 그것이 꿈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사에 합격하여 입교하게 되면, 군장학생 선발에 합격하며 받았던 등록금을 반납해야 했으며, 그 것은 당시 집안 사정에 의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고, 시험장 문턱까지 들어섰던 나와 몇몇 친구들은 함께 입대하여 다른 기회를 노리자는 다짐하며, 당시 시험장 근처의 해수욕장에 뛰어들어 잘 한 선택일 거라 서로를 위로하였다.






군 생활


 2011년 2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남자라면 대부분 겪었을 것이다. 입대한다는 것의 무게는 자원입대임에도 불구하고, 스무살이 갓 지난 우리에게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으며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몇달간의 교육이, 군에서 간부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겁고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반입대의 힘은 컸다. 힘들고 지쳐도 고개를 돌리면 생사고락을 함께할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넉달간 훈련소 및 부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육군 하사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육군 항공학교에서 주특기 교육을 받았으며, 시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시력 교정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라식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헬기 조종사가 되려면 라식수술을 받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몰랐고, 민항에도 자격요건으로 불가능 하진 않으나,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이 입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어 엄청나게 후회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는 정보력도 부족했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판단력도 부족했었다.


 첫 자대배치는 대구공항에 있는 11전투비행단 내에 위치한 육군 헬기부대였다. 기종은 500MD(민간 369D) 헬기였으며 였으며, 20대 초반인 나는 간부로서 막내 생활을 하며 약 6개월간의 영내 생활을 거친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 처음으로 사회에 놓여진 나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항공`이라는 분야에서 내가 무언가 하게 되었고, 내가 공구를 대고 정비한 헬기가 떠오르는 것에 상당한 보람을 느꼈으며, 무엇보다 대구공항의 활주로에 인접해 있던 부대에서 밤낮으로 뜨고 내리는 민항기를 보며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다.


 당시 몇 달 더 일찍 입대했던 동기와 2년 뒤 입대한 후배 한 명과 마음이 잘 맞았다. 우리는 군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모두 각자가 꿈꾸는 미래가 있었다.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치며 피곤한 줄 몰랐던 우리는, 그렇게 퇴근 후 우리는 각자 학원으로, 다시금 독서실에 모여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공부하였으며, 독서실 옥상에서 막연하지만 꿈만 같은 미래를 상상하며 뻐금뻐금 담배를 피워댔었다.


 그렇게 우리는 힘들었지만 서로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2015년 9월


 그러던 2015년 9월 밤 10시 경, 여느 날처럼 독서실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친한 부대 장교로부터 소식을 듣게 된다. 동기 중에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이번에 민항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처음으로 시력 교정술을 받은 사람이 항공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이날의 감정을 글로써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날 나는 남은 군 생활과, 그 동안 내가 받게 될 급여와 퇴직금을 계산하였고, 금전적, 시간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판단하느라 밤을 새웠다.


 결론은 났다. 약간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Plan A, B, C를 세웠고 각각의 리스크가 있었지만 모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향후 몇 년간 꾀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짐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며 어떠한 시간을 보낼지 오늘 스스로와 약속하고, 꿈을 이룰 때까지 그렇게 살자고.


 모든 것의 시작은 의외로 `회전익(헬기) 정비 면허` 였다. 20대 초반의 결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꾀나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지만, 만약에 어떠한 이유(당시에는 불가항력을 제외하고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로 좌절하게 되었을 때, 내가 돌아올 곳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정비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그 것을 시작으로 내가 생각했던 민항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역량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약 반년간의 준비를 거쳐, 2016년 4월.

생일을 3일 앞두었던 날. 꿈에도 그리던 생에 첫 비행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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