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알 수가 없는 게, 아이는 길 걷다 누구라도 지나가면 몸서리를 치며 저 아저씨가 자길 본다고 무섭다고 엄마가 안으라고 난리를 치면서, 누가 뭐 좀 눈길 끌만한 거라도 가지고 있으면 너무나 서슴없이 다가가고 만져보았다. 나아가 "이거 줘"하며 본격적으로삥을 뜯기도 했다. 겁이 많은 건가 없는 건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는 나의 혼란은 둘째치고 이제 막 두 돌 지난 이 아이의 눈길은... 너무나 쉽게 끌리었다. 겨우 두 해 살았으니 반짝거리는 거 달랑거리는 거 사각거리는 거 동그란 거 세모난 거 빨간 거 파란 거 그래 죄다 신기하겠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으나,탐난다고 마음대로 다 만지고 다 가질 수는 없는 법. 난 엄마이니 에헴, 그걸 가르쳐야 했다.
그러나자식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신문물로 인하여 한껏 들뜬 아이를, 저건 네 것이 아니다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 워워 진정시키기란 여간 험난한 일이 아님을. 눈길이라 표현했지만 실은 온몸을 던지고 있달까. 내 저것을 꼭 만지고야 말겠다아아아!!라는 어떤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몸짓. 간혹 사람 많고 조용한 곳, 예를 들면 병원 대기실 같은 데서 그런 일이 시작될 때는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거기서 누가 쳐다보기라도 하면 온몸에 땀이 폭발한다. 여러분 제발 모른 척해주세요 시끄럽고 불쾌하시죠 저라도 그럴 거예요 제가 어떻게든 조용히 시킬게요 잠시만 모른 척 좀요 제발 플리즈... 모두에게 최대한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내며, 또 최대한 침착하게 아이를 설득했다.
아이가 말을 잘 이해하는 건지 내가 의외로 엄마가 적성인 건지(?), 다행히 아이는 초반 러시에 비해 설득은 꽤 잘 되는 편이었다(가끔 아닐 때도 있지만). 이건 아저씨 거다, 만지면 안 된다, 간결히 말해주고 난 다음, 대신 이걸 갖고 놀자 혹은 대신 저기 구경 갈까 하며 대안을 제시해주면 금세 환기가 되었다(물론 아닐 때도 있지만).
아이 피부에 오돌토돌한 것이 자꾸 나서 소아과를 간 날이었다. "청진기는 의사 말고 엄마가" 하라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살짝 시무룩해진 아이는, 뭐라도 자기 지시대로 되는 꼴을 보고 집에 가고 싶었는지 뜬금없이 몸무게를 재자 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덧붙였다. "의사 말고 엄마가!"
웃기고 귀여워 죽겠는 걸 참고, 나는 그녀의 제안이 되게 큰 일인 것처럼 연기했다.
"그럴까?? 의사 선생님 말고 엄마가 몸무게 재줄까? 알겠어!!"
뜻대로 되고 나자 한껏 흥이 오른 그녀는 "이제 집에 갈까?" 하며 문을 향해 매우 호탕하게 걸었다. 저리도 호탕할 일인가 웃긴 걸 또 참고, 호탕한 뒤통수에 대고 들리지 않을 잠시만을 외치며, 우리의 외투를 집어 드는 데 걸린 시간이 5초일까? 아니지 3초? 여하튼 외투에 찰나의 한눈을 판 사이, 그녀는 웬 주황색의 동그란 것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제엔장...
"이거 온유 해!"
미치도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녀의 앞에는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옆에는 엄마도 있었다. 사실 둘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아까부터 생각했던 모자였다. 피해자(?)의 보호자가 옆에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사과도 두 사람에게나 할 수 있다. 마음의 부채가 쪼오끔 덜어질 것 같달까.
빛의 속도로 달려가 주황색의 동그란 물건에 뻗어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다행히 닿기 전이었다.
"만지면 안 되지. 이건 오빠 거야."
침착하고도 신속하게 말하고, 아이와 엄마에게 사과를 했다. 집에 가서 '블럭 언니'한테 자동차 만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냐는, 요즘 그녀의 최애 장난감 이야기를 하며 꼬셔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눈은 확고했고 억지로 내려뒀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안아 들어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가져도 되는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이거 가져도 돼요!"
내 앞에 물건을 쑥 내밀며 아이가 그렇게 말하니, 옆의 엄마가 물었다.
"아기 주려고?"
"어. 이거 그냥 연필 깎인데 뭐. 나 안 써."
나는 그제야 주황색의 동그란 것을 똑바로 보았다.햄스터인지 다람쥐인지 모를 무언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귀가 쫑긋 올라와 있어서 아주 귀여웠다. 아이가 관심을 가질만했다.
물건의 주인이 된다 하니, 내 팔을 냅다 팽개치고 아이는 연필깎이 앞으로 직진했다. 말똥한 눈으로 그걸 보고 있는 아이에게, 초등학생은 "이거 이렇게 하는 거야"하며 오뚝이 기능도 보여주고 돌려서 분리하면 연필깎이가 나오는 것도 보여주었다.
"짠!"
시연이 끝나고 초등학생이 아이 손에 물건을 쥐어주자, 그녀는 방금 오빠가 한 것처럼 그걸 분리해 보고자 애를 썼다.
"진짜 고마워. 온유야 오빠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
머리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하고 아이는 다시 행복하게 분리작업에 몰두했다.
주머니에 줄 건 아무것도 없고, 기억해야지 싶어 이름을 물었다. 규호란다. 이규호. 어머니께 아들을 어찌 이리 훌륭히 키우셨냐고 묻고 싶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을 못 본 게 참 아쉽다. 얼굴도 기억해두면 좋을 텐데.
사실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아이들의 이름이 꽤 있다. 꽃을 줬던 경륜이, 빼빼로를 줬던 민찬이와 마술상자를 줬던 경식이. 심지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도 먼저 다가와 딱지 하나를 건네줬던 아이도 있었다. 이름은 태호(제대로 못 들어서 태호인지 태오인지 태우인지 정확하지 않다). 태호는 그 뒤로도 놀이터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말이나 행동이 어찌 그리 바르고 착한지.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주변에 죄송하고 고마운 일이 참 많이 생긴다. 민폐 끼치기 싫고 방해받는 것도 싫고 도움받는 것도 싫은 내 캐릭터랑은 충돌이 좀 큰 역할이랄까.
그러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나도 어릴 때 분명 저랬겠지. 누구나 그랬겠지. 인간은 살아가며 때로는 폐를 끼치고 도움을 받고 또 그러다가 도움을 주기도 하며 사는 거구나. 그렇게 맞물리고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구나. 그러니 고마워하자. 그러니 남의 폐에도 좀 허허 웃어넘기자.
언니들이 먹는 주스가 궁금하던 16개월 인생. 친절한 초딩 언니는 주스를 주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단 주스는 못먹는다 하자, 그럼 병이나 실컷 만지라고 무릎까지 내어줬다.
규호, 규호, 이규호. 까먹지 않게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며 아이와 함께 병원 복도를 걸어 나왔다. 아이는 여전히 연필깎이를 뺐다 끼웠다 하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이거 오빠 거야!"
"어, 오빠 거였는데 오빠가 온유한테 줬지. 엄청 고맙다, 그치?"
(잠시 생각) "이거 온유 거야!"
(끙..) "그치. 이제 온유 거지.그러니까 고맙"
(됐고) "오빠 거였는데, 이제 온유 거가 됐어!"
고마운 건 잘 모르겠고, 아이는 일단 이 대단한 물건이 자신의 소유가 됐다는 것에무척 만족한 듯했다.알려줄 마음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려진 이건 대체 뭘까. 햄스터인지 다람쥐인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아이는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귤이야."
"귤이야??? 이게 귤이었어?"
"응. 귤이야."
그렇게 연필깎이는 귤이 되었다. 귀도 달려 있어서 도저히 귤 같아 보이진 않지만, 그냥 귤에 얼굴 그려 넣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의 놀이방에 입성한 귤은 주로 블럭놀이 때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먹고 자고 싸고 노는 활동(?)을 했다. 주방놀이에 진짜 귤 역할로 동원되기도 했으며 '넘어진귤 먹는귤 아닌귤 맞는귤' 등등 수많은 유행어를 낳는 쾌거를 이루었다.
언니, 오빠와 함께 식사중인 귤
그러나 태호가 준 딱지와 경식이가 준 마술상자가 그랬듯,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연필깎이도 아이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장난감 정리라는 명분 하에 버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버려지겠지. 하지만 함부로 "이거 온유 해!" 하는 내 아이의 무례한 말을 친절로 돌려준 그 이름은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고마움을 아는 나이가 되면, 아이에게도 기억해둔 이름들을 말해주어야겠다. 너의 어린 날, 불쑥 내미는무례하고 작은 손에 선물 하나 선뜻 올려준 이름들이 있었노라고. 덕분에 너는 며칠 동안이나 만족하고 즐거웠고 행복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