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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으로 넘어지셨다. 낮은 턱을 보지 못해 발을 헛디디셨던 것. 손을 쓸고 지나간 배낭의 감촉에 후끈거렸다. 미간에 주름이 그려질 새도 없이 배당의 무게에 놀라 멍하게 서 있었다. 넘어짐의 속도도, 걸음의 속도만큼 빠르지 않았다.
강화터미널에 머리가 검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선 둘이었다. 수를 셀 만큼 인상적이었다.
터미널과 버스를 오르내리는 속도는 더디었다. 넉넉한 사람들이 누리는 느릿한 걸음이 아니라, 축적된 세월의 무게가 만든 속도였다. 허리는 굽어 있고, 걸음은 온전치 않았다. 그럼에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몸무게만큼 무거운 배낭을 진 채.
터미널에서 한 시간 정도 들어가 석모도 보문사에 당도했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했던 번거로움은 올해 개통된 석모대교로 하루 10편 남짓 섬과 터미널을 달리는 버스가 덜어줬다.
속계와 진계를 구분짓는 일주문을 통과하며 기대한 고요감은 무리 지은 아주머니, 아저씨, 학생들로 누릴 수 없었다. 한마디라도 피할 요량으로 빠르게 움직인 발걸음과 낙조가 아름답다는 보문사를 한낮에 찾은 무모함 덕에 마애석불좌상 앞에서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9m에 달하는 석불좌상을 뒤로 하고 온 길을 내려다본다. 돌계단, 전등 하나하나, 사람이든 사람이 모는 기계의 손을 거쳤다. 속세에 몸담은 인간이 품은 불안과 욕망의 높이는 해발 235m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암벽 사이의 일본 에노시마 이와야 동굴 사원에서 느꼈던 경외가 떠올랐다.
해가 서서히 기울자 낙조를 보러 오는 인파가 위를 향했다. 산을 등지고 내려오는 나를 잡고 중년 남성 다섯이 사진을 부탁했다. 차오르는 숨 사이로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그들 등 뒤로 산행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 어스름이 깔렸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해가 단숨에 수평선에 걸렸다. 길고 은은하게 붉은 빛이 퍼졌다. 가깝고 먼 섬이 보이던 정상의 낙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일몰을 보며 언제까지 중천일 수 없을 나와 사랑하는 이들의 저무는 시간을 생각한다. 조건 없이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숙명만큼, 저물어가는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자식의 숙명이, 인간이 지닌 숙명의 굴레가 잔인하고 서글프다. 언젠가는 작별을 고해야 할 이들을 나는, 아름다운 빛으로 가슴에 담아둘 수 있을까. 터미널의 할머니처럼 노쇠해질 나의 어른들의 시간을 나는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아직은 어린 마음이 욱신거린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 열반송(涅槃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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