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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 Jan 08. 2019

총을 쏘는 남자, 시를 짓는 광대, 그리고 여자들

사랑하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 영화 <로마>에 대하여.

새해 들어 처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Roma)>(2018)를 보기 위해서였다.


쿠아론 감독은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2002), < 칠드런 오브 멘>(2006)에서부터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들>(2004), <그래비티>(2010)까지,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멕시코 감독이다. 지난 해 겨울, 넷플릭스를 통해 처음 공개된 <로마>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그의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감독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오는 깊이와 단순함을 모두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쿠아론 감독의 마스터피스: 계급의 차이, 성별의 차이에 의해 보는 인간사의 한 단면

<로마>의 중심에는 한 부부와 그들의 네 아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집안일을 돕는 하녀이자 보모인 두 여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고학력자 백인(각각 의사와 생화학자인 부부), 그들의 백인 자녀, 그리고 멕시코인 하층민 여성 둘(이 중에서도 '클레오'라는 하녀)로 구분된다. 이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가족 같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가족이 아니라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이다. 하녀들은 주인 부부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개똥을 제대로 치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윽박을 들어야 하고, 전기세를 축낸다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밤에는 촛불을 켜야 하는 신세이다. 그러나 '클레오'는 자신의 신세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 집안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최선으로 돌본다.


아이를 안고 달래는 클레오의 모습

이야기는 1970년 말에서 1971년 사이, 멕시코시티가 성체축일 학살 사건(학생들의 시위를 정부가 지원한 단체가 무장진압한 사건) 등을 겪은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특수한 역사적인 시기이건 그렇지 않건 인간의 삶은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남편은 젊은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 결혼, 육아와 함께 경력이 단절된 여성은 남편을 지키려고 또는 경제적인 안정함을 유지하려고, 또는 남성의 외도가 자신의 실패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막으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고,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이 영화의 (중산층)아이들은 자신을 돌봐줄 다른 인물을 찾는다. 여기에서는 클레오(하녀)가 그런 인물이다. 그러나 클레오는 원주민계 하층민 출신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또 다른 원주민계 하층민 출신의 남성과 교제하여 첫 성경험에 아이를 갖고,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커녕 클레오와 뱃속 아이 모두를 위협하는 남성에게 버림 받는다.


인간의 삶은 비슷해 보인다. 그저 비극이 있으며, 비극에 순위가 조금 있을 뿐이다.


의사인 남편은 곧은 직선들의 병렬로 만들어진 포드를 타고 '정확히' 등장한다. 그의 퇴근시간은 조금 늦었을지언정(가족들이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과 그 표정은 보는 이 또한 이 남편 인물에 대한 경이를 일으킬 정도이다) 그의 주차실력은 매우 뛰어나다(적어도 뛰어나 보이고자 해 보인다). 클레오의 남자친구의 무술 자세 또한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데에 있어 거침이 없다. 그들 사이의 차이라면, 백인 의사인 남편이 퀘벡으로 출장을 떠나고 젊은 여성과 외도를 즐길 수 있다면, 클레오의 인디언계 남자친구는 정부의 사주를 받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는 일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 하는 여가 활동의 내용이 조금(...) 다를 뿐이지, 이들이 결국 자신의 아이의 양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만큼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떠한가? 생화학자였던 부인은 자신의 엘리트적 출신 성분을 잊고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남편에 매달려 보지만 결국 그를 잃고 아이의 뺨을 때리거나 하는 히스테릭한 면모를 보여준다.

 

출장을 간다고는 하지만 출장은 일주일 뿐이었고, 앞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끌어안는 부인의 모습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직업을 찾자 이내 나름 쿨하게 남편을 잊기로 결정한다. 출판사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며, 별거 소식을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전하는 부인에게 큰 아이가 "엄마는 생화학자잖아요" 묻자, "내가 책도 좋아하잖니"라고 답하는 여성의 모습은 어째 어색하지 않다. 출산과 양육, 남편과 가족의 보살핌 노동에 경력이 단절된 여성에게는 이나마도 어쨌든 사회생활 및 경제활동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남성의 아이를 가진 가난한 클레오는 어쩌면 좋은가.



여성, 그 중에서도 하층민, 유색인종인 여성

클레오가 임신 사실을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알리자 그는 곧장 사라져버린다. 몇개월 뒤 클레오는 다시 그를 찾아나선다. 눈으로 보기에도 조금 불러온 배와 함께 나타난 클레오에게, 무술에 인생을 바치기로 했다는 남성적인 그는 무술 자세로 위협을 가해 보이며 '너와 니 뱃속의 아이를 내가 때려버리기 전에'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클레오 앞에서 무술을 시전한 것은, 그녀와 성관계를 나눈 직후 혹은 이전, 그리고 그녀가 찾아와서 위협하는 장면에서 한 번, 그렇게 총 두 번이었다. 그러니까 클레오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잉태한 순간과, 같은 남자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아이까지 거부당한 순간이 같은 시각적인 장면(남자가 무술을 행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셈이다(반대로 말하면 그 남성 역시 그 두 상황에 대해 같은 무술(?)로 응답한 것이다).

이는 가난한 여성(그리고 남성)의 삶의 빈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진 것 중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진솔함과 침묵, 또는 무술 실력밖에 없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주요한 순간에 대해서도 그것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또 홀로 남겨진 클레오에게 삶은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슬픔과 앞날에 대한 걱정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가 타인에게 임신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자신의 고용주인 가족의 부인에게 "나를 해고하실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 뿐이다. 그녀에게는 이야기(드라마)가 없다. 다만 그녀는 오프닝 컷에 나온 것처럼 바닥을 닦고, 또 다시 닦는 인물에서부터 엔딩 컷의 옥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그러니까 바닥에서부터 하늘까지 향할 수 있는 사람이다.


최하의 인간이고 그 이상을 꿈꾸지 않는, 그 이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다시 말해 추락했기 때문에 비상할 수 있는 인간일 뿐이다.  



역사, 혹은 인간사: 남자들은 총을 쏘고, 광대와 아이는 이야기를 짓고, 여자들은 삶을 기른다. 죽음이 우리를 침범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끝이 아니도록.

극장의 스크린보다 넷플릭스를 통해 먼저 공개되고 그런 작품에 베니스영화제가 황금사자상을 수여하는 등 이 작품은 그 개봉 및 수용 방식에서부터 변화하는 영화산업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 내용에서도 역시 세계의 변화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은 1970년대 초반, 멕시코시티를 다루고 있어 시공간적 차원에서 모두 현재의 우리와는 거리가 있지만, <로마>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다 근본적인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사의 격변 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에 주목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찰해내는 인간사의 한 부분을 비교적 친숙한 것으로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별장에 모여 연말파티를 즐기다가 연이은 폭죽 점화에 의해 산불이 나자 이전까지는 성별, 지위, 출신지역과 나이 등에 의해 각자 해야 할 일(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취하고 누군가를 겁탈하려 하던가, 여자들은 그런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거나 절대로 미니스커트를 고수하거나, 아이들은 물건을 깰 것처럼 위태롭게 뛰어다니거나)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불을 끄기 위해 인간띠를 만드는 등 합심한다. 이 장면에서 자연 재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가장 본연적인 모습이 등장한다. 결국 인간이 살아남은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머리를 맞대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교과서들은 말헸다...)


그런가 하면 이 장면에서 <로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요소를 선보인다. 일전 파티 장면에서 지푸라기 괴물처럼 분장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던 주변인물 하나가 프레임의 중심에 등장해 산불과 산불을 끄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의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인간의 일(자연재해로부터 자신을 지킨다)에 대해 '노래'(시를 읊는 것)를 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야기꾼들의 역할이었으므로, 쿠아론이 여기에서 이야기, 그러니까 서사와 예술에 대한 메타포로서 이 장면을 동원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뜬금없는 해석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중심인물인 클레오의 경우에는 자신의 인생을 절대로 드라마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혼자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가난하고, 또한 버림받은 클레오는 침묵한다. 그녀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클레오와 집안의 막내 아들이 함께 옥상에서 '죽어 있는' 모습

그것은 클레오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의 막내 아들과의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이 금발의 사랑스러운 막내 아들은 구술 언어에서 마음대로 시제를 넘나드는 능력을 보여준다. "내가 늙었을 때는요, 난 익사로 죽었어요" 같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다. 클레오는 묻는다. "네가 늙을 '미래'에?", 하지만 아이는 "그게 아니에요, 내가 늙었을 때[과거 시제]에요"라고 말한다.


시제를 넘나드는 능력은 이야기꾼에게 주어진 능력이다. 그러니까 지푸라기 괴물(광대)과 아이(백인, 막내)에게는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다. 미래와 과거를 넘나들고, 비극 앞에 노래할 수 있는 힘 같은 것 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클레오를 비롯한 하녀들의 빨래터인 각 건물의 옥상에 이 작은 막내가 올라온 적이 있다. 아이는 갑자기 위 사진처럼 누워 "나는 죽었어요"라고 말한다. 클레오는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 묻지만 아이는 반복해 "나는 죽었어요" 말한다. 클레오가 그 건너편에 누워 본다. "나도 죽었어". 그리고 말한다.


"죽는 것은 편안하구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수영을 못함에도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클레오의 모습


로마, 여성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도시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물론 영화의 사건이 벌어지는 지리적인 중심지가 멕시코시티 내 로마 지역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로마라는 도시가 지닌 상징적인 의의와 앞서 살펴본 영화의 면모들을 떠올려보면 보다 다층적인 독해의 여지가 생겨난다.

자크-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루브르박물관

로마에 전해 내려오는 건국 신화의 중심에는 로마와 알바 롱가의 전투가 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보내 싸우는 대신 각각의 도시에서 가장 용맹한 세 남성을 겨루게 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 롱가에서는 큐리아티 가문의 형제들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위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은 전투에 나서기 전 호라티우스 가의 세 형제가 아버지에게 승리를 맹세하는 영웅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다시 조국인 로마를 상징하므로, 이 사건은 로마를 지킨 남성들의 애국심과 동시에 자신을 희생하여 보다 큰 가치를 지켜내는 남성적인 용맹함의 상징이다.


호라티우스 형제는 큐리아티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로마를 지켜냈다. 그러나 그들 중 둘은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큐리아티 가문의 남성들도 모두 사망하였다. 이들의 죽음은 남성적인 용맹함의 증거물인 동시에, 이들을 사랑으로 길러낸 여성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상실이었다.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전장에 나가기 전, 가장 굳건한 맹새의 순간을 담은 다비드의 그림에는 이미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예견한 데에서 오는 깊은 슬픔 속에 빠진 여성들, 아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크-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새의 여성들과 아이들 부분

애국심, 희생정신, 공화정에의 가치에 대한 믿음 등이 로마를 지켜낸 남성적인 덕목이라면, 로마가 남성적일 수 있도록 한 것은 벽 한켠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남편이 '남성적'인 이유로 자신과 가족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아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 죽어도 다시 아이를 돌보고, 어른으로 길러내기 위해 자신을 모두 바쳤다. 영웅적인 덕목을 갖춘 남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겨지는 것을 저버릴 때에도 여성들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쿠아론의 <로마>가 '로마'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인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도시인 로마는 사실 여성들의 땀과 눈물로 지탱되어온 도시일 수 있다고. 로마가 어떤 기원을 상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아이를 구하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라면 지체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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