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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Jan 24. 2023

[도서/영화] 하얼빈의 영웅

책과 영화로 만난 안중근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과 뮤지컬 영화 '영웅'을 비슷한 시기에 접했다. 표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안중근 의사를 향했고 메시지는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뮤지컬을 기반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대사와 노래로 인물들의 상황과 심정을 전했고, 마치 무대가 암전되듯 장면의 전환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소설은 잘 짜인 문장과 구조로 역사를 재현해냈다.

사실 안중근 의사라고 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순간에 집중해서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거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독립운동가 너머의 안중근이라는 사람과 그의 활동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우선, 이토를 살해한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죄드리오

하지만,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밝히고 싶소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나라 위해 싸운 이들 벌할 자 누구인가

과연 누가 죄인인가 벌할 자 누구인가

나라 잃은 고통 알까 누가 죄인인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했다는 사실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문명국으로서 재판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고, 안중근의 행동은 이토 히로부미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한 한국인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개인이 자객으로서 행한 일이 아니라 국가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었다는 것을 강조했고,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안중근의 저격은 긴박하면서도 절박한 선택이었다. 외교권이 박탈되어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어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투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나라의 위기를 느끼고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인재가 양성될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일본의 병합 과정이 느슨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전환하여 의병으로서 군사활동을 하고 기회를 기다리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부재가 한일 병합을 앞당겼다는 말은 마치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빨리 왔다는 말처럼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다. 이미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에 비가 왔을 뿐이다.





 

마나베는 자신의 질문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덕순은 마음속의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에 답했고, 사실을 들이대며 질문을 부수었다. 우덕순은 행위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고, 동기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다. 우덕순은 마나베의 질문이 미리 설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답변이 질문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32-236


안중근과 뜻을 함께한 사람들 또한 목적이 같아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거사를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살아남으려는 미련을 버렸고, 인권과 자유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근거하여 움직였기 때문에 당당했다. 그 기세에 당시 법정에서도 불안을 느끼고 방청객들을 내보내기도 했다. 소설에서 그린 재판 장면이 상당히 강렬해서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안중근과 동료들은 충분히 불리하게 짜인 재판에서 흔들리지 않았고, 외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했다. '질문을 부수고 올라탈 기세'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며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인물들의 각오와 자신감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토, 당신의 헛된 꿈은 이제 끝났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내 꿈도 이젠 끝이오."


미조부치는 분도에게 안중근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분도가 안중근의 사진을 보면서
― 이것은 나의 아버지다.
라고 말했다고 미조부치는 청취서에 기록했다.

김아려는 이토가 이미 죽었으므로 남편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던 이 년 전에, 남편은 돌아올 수 없을 것으로 김아려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하자 결정은 사실처럼 굳어졌다.
… 김아려의 마음속에서 남편은 죽었다. 죽음은 바뀔 수 없었다. p.201-203


안중근은 의병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이자 아들이기도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실제로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사람으로서 굳건하지 않고는 가족을 데리고 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추측과 같이 소설 속에서의 김아려는 일본의 심문에 담담하게 응한다. 안타까운 장면은 불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첫째 아들, 분도를 통해 가족의 존재가 밝혀지는 부분이었다. 일본은 안중근에게 가족사진을 들이밀며 감정을 건드리려 했지만, 그는 가족의 안부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르고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대답한다. 안중근의 독립운동은 가족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미래 세대는 독립된 국가에서 살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각오로 뛰어든 사람으로서 덤덤한 자세를 유지했을 것이다.







"아들아. 네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나라를 위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탈고한 지 열하루 뒤에 안중근은 집행되었다.

아침에 옥리들이 감방에 새 옷을 넣어주었다. 안중근은 집행 절차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명주 두루마기와 바지가 개어져 있었다. … 명주 두루마기는 부드럽고 포근했다. 새 옷의 향기가 몸에 스몄다. p.276


안중근의 어머니가 직접 아들의 수의를 만들어 보냈다는 일화를 들었을 때 놀랍고 먹먹했다. 다른 누구보다 안중근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사람은 부모님일 텐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입을 옷을 짓는 심정은 감히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영화에서 안중근이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꺼내 손으로 쓸어내리던 어머니가 수의를 바느질하는 모습에 마음이 무너졌다. 아기를 기다리며 옷을 만들 때의 설렘과 전혀 다른 비장함과 슬픔이 가득 찼을 것이다. 마음만큼은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아봤으면'이라는 대사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가족 입장에서는 대의 보다 우선 내 아들과 형제, 남편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저 평범하고 조용하게 지내기를 바랄 수도 있었다. 만일 나였다면, 죽음과 고통이 뻔히 보이는 길로 걸어가는 걸 두고 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무엇이 정말 안중근을 위하는 길인지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그저 지켜보는 것이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만류하기보다 그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한 가족 덕분에 안중근은 흔들리지 않고 대의를 향할 수 있었다.







"나는 무기를 손에 들었지만 내 아이들은 기도하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반도의 면면촌촌에서 죽음을 잇대면서 무너지고 또 일어서는 의병 부대들을 안중근은 생각했다. 계통이 없고 대열이 없는 복받침이었다. 한없는 죽음이었고 한이 없을 죽음이었지만, 국권회복은 죽음을 잇대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p.93


테러리스트라는 일본의 주장과는 다르게 안중근은 평화주의자였다. 그가 옥중에서 지은 '동양평화론'에는 당시의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동양 국가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각 국가의 정체성을 인정하며 군사 및 경제 부문에서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현대의 유럽연합과 같은 방향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동양평화론의 집필이 완성되지 못한 채 형이 집행되었지만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는 명확하다. 진정한 힘은 파괴력이 아니라 협력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많은 국가들은 전쟁보다 화합을 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p.306


뮤지컬 '영웅'을 꽤 오래전에 보았기 때문에 중요 장면과 넘버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워낙 이미지가 강렬한 작품이라 영화를 관람하며 떠올랐다. 배우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애국과 독립처럼 다소 민감하면서도 진지한 주제를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안중근이라는 인물 자체의 무게감을 딛고 영화 및 공연에서 살아있는 안중근을 보여준 정성화 배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와 영상을 통해 실제 안중근을 마주한 기분이라 완전히 몰입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소설 '하얼빈'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인물의 특징과 상황을 고스란히 전했다. 절제된 문체와 툭 던지듯 투박한 말투는 세세한 묘사와 표현에 익숙한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사건을 지나치게 추측하고 해석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와 더불어 '말은 자욱했는데, 아무도 말을 믿지 않았다.'와 '그는 말을 내질러서 글에 머뭇거림이 없었다.'와 같이 짧고 강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미처 어울릴 거라 생각하지 못한 단어 및 서술어의 조합과 표현을 통해 직관적으로 상황 파악이 가능했고 긴장감을 더했다.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김훈 작가의 책을 필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안중근의 유해 아직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서 효창공원빈 묘소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며 영향을 주고 다양한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기회를 간절하게 구했지만 정작 얼굴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토로 보이는 사람과 그 주변을 호위하던 사람들을 총으로 쐈다고 한다. 그는 기회를 잡는 데 어떤 핑계를 대거나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무모하리 만치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청춘이었다. 그건 안중근뿐만 아니라 하얼빈에서 함께한 동지들도 그랬다. 따라서 '영웅'은 안중근 한 사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나라를 위하여 싸운 모든 사람들에게 붙이고 싶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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