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삿포로에서 만난 집
다이어리에 새해 다짐으로 '여행으로 월급 탕진하기'를 써둔 뒤 열심히 실천 중이던 2016년.
시간은 흐르고 흘러 12월이 됐고, 남은 휴가는 딱 이틀이었다.
부랴부랴 한 해의 마지막 여행지로 갈만한 곳을 알아보다 함박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는 삿포로로 향했다.
출발 1주 전에 비행기 티켓을 끊은 터라 당장 묵을 숙소부터 정해야 했는데, 리뷰란 리뷰는 예약사이트별로 모조리 읽어보고 고심하는 평소와 달리 한국인 숙박객 한 분이 쓴 글 하나만 읽어보고 오 여기서 지낼래!라고 꽂힌 곳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유유(Guest House Yuyu)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니 우선 깨끗할 것 같았고, 몇 장 올라온 사진을 보니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내 또래 청년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삿포로 지역 기업가들의 투자를 받아 운영 중이라는 점이 끌렸다.
삿포로 산 치토세 공항에 내린 건 밤 10시가 넘은 시간.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주소를 보여드리고 출발했는데 눈길을 한참 달리다 갸우뚱,하신다.
-주소는 여기쯤이 맞는데...여기가 게스트하우스라고요?
뭐가 문제지? 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한국의 정자 같기도 하고 일본의 신사 같기도 한 작은 건물 하나가 있고 그 뒤에 컨테이너 박스 2개 정도 되는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의 집이 있었다.
혹시 여기가 아니면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그것도 말도 잘 안 통하는 일본에서 어쩌지...
라고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살펴보니 다행히 '게스트하우스 유유'라 적힌 간판이 붙어있었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는 걸 도와주며 기사 아저씨도 신기하다는 듯, 한참 보다 가신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녀온지 1년이 넘은 지금도 기억나는) 타닥타닥 가스히터 타는 소리, 나무 냄새 등이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눈 냄새와 섞이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 여기 벌써 맘에 든다.
(미리 레이트체크인 관련해서 메일을 보내놓긴 했지만)
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 준 스탭이 수줍게 맞아주며 자기를 카즈마, 라고 소개한다.
카즈마상이 게스트하우스 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고 조용히 이곳저곳 구경시켜주는 동안
나는 나무판자로 된 깨끗한 바닥에 맨발로 걸어다니는 느낌이 좋아 계속 배시시 웃었다.
최근 몇 년 간 주로 유럽, 미국 등 서양문화권을 다니거나 아시아권에서도 호텔에서 묵었던 터라,
여행을 가면 실내에서도 카펫 바닥 위를 신발 신고 걸어야겠거니 하다가 급 편안함을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어서와요(お帰り, 오카이리)!
여행 첫 날.
구경하다가 추운 날씨와 눈보라에 지쳐 오후에 잠시 숙소에 들렀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게스트하우스 스탭들(4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근무했다)이 다같이 인사를 건넸다.
-...?
고등학교 제2외국어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어찌저찌 알아듣긴 했지만, 약간 어리둥절했다.
집도 아닌 여행지에서 외출이 끝나고 돌아왔는데 어서와 라는 말을 듣다니.
하지만 벙찐 것도 잠시, 여기서 맞아주는 방식이구나 라는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스탭들과 마루 격인 응접실에 앉아 수다를 떨며 친해졌다.
둘째날부터는 나도 자연스럽게 신발장에서 겨울용 부츠를 꺼내 신으면서
"다녀오겠습니다(行ってきます, 잇테키마스)!"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카운터 뒤든, 문이 열려있는 방이든, 부엌이든
어디에선가 "다녀오세요(行ってらっしゃい, 잇테랏샤이)!"라고 대답해주는 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스탭이 청소 등으로 바빠서 내 인사를 못 들으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거나 응접실에 앉아서 여행일기를 쓰고 있던 다른 혼자 여행 온 숙박객이 대답해주기도 했다.
그 인사말이 게스트하우스 유유에서 늘 틀어놓던 잔잔한 음악과 어우러져
머무르는 내내 그렇게 정겹게 들릴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했던 삿포로 여행은 3박 4일.
그런데 설국 삿포로에서도 이례적인(!) 폭설로 산 치토세 공항이 폐쇄되어서
귀국예정일의 모든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항공사와 연락해서 겨우 그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변경했지만, 나는 내년 몫의 휴가를 당겨써야했다.
내가 비우는 동안 내 일까지 챙겨줄 사수들에게 보내야했던 장문의 사죄 카톡과
딸 혼자 급 떠나는 여행이 처음부터 마뜩찮았던 부모님의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잔소리는 덤.
하지만 덕분에 삿포로에서의 하루가 더 생긴 나는 평소의 불안초조걱정 모드를 잠시 끄고,
게스트하우스 스탭+혼행 손님들과 신나게 숙소를 나서서
삿포로의 특산 요리라는 징기스칸(양구이)과 나마비루를 마시고 스탭인 사키짱의 단골 라멘집에 가서 콘버터라멘을 흡입했다. (일본에서는 술을 마실 때 2차로는 라멘집을 가서 속을 푼다고 사키가 알려줬다. 이런 가깝고도 먼 나라 같으니...)
결론은 겨울 삿포로 여행 추천,
특히 (틀에 박힌 문구 같지만) 내집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 게스트하우스 유유 두 번 추천!
여름에는 라벤더 축제를 구경하러 많이들 간다던데, 삿포로의 여름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