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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Dec 23. 2019

생애 절반은 오기와 질투

2020을 맞이하며

요즘은 친구의 소식이 저절로 내 피드에 찾아온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한번 친구를 맺은 사람, 혹은 내가 ‘팔로우’한 사람의 게시물을 내 창으로 배달하는 구조다. 그러나 버디버디나 싸이월드 시절엔 어떤 이의 소식을 알기 위해선 그의 페이지를 방문해야만 했다. 내가 그 사람의 페이지를 방문할 때마다 ‘today’의 숫자가 꼬박꼬박 올랐다. 내 방문은 아주 꾸준했기 때문에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로서는 today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뜨끔했다. 거기에 실수로 댓글을 남기거나 잘못된 게시물을 클릭하지 않아야 했다. 잘못된 게시물이란 방문자 추적기를 말한다. 방문자 수인 ‘today’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은 사람들은 몇 명이 방문했는지도 모자라 누가 방문했는지까지 알고자 했다. 그래서 클릭하면 저절로 로그인한 사람의 아이디로 저절로 댓글이 남겨지는 게시물 같은 걸 중간중간 숨겨놨다. 그런 것들을 피해 그 사람의 일상을 엿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내가 좋아한 사람들의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슬프고도 애석하게도, 자신의 일상을 인터넷에 잘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는 소셜미디어 계정 정도만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해선 그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친구일 사람의 페이지를 훑어봐야만 했다. 그치만 그건 역으로 내게 누군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소름끼치는 일이라서, 나는 그 사람을 소름끼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내 흔적을 열심히 지웠다. 그러니까 나는 눈 오는 날의 도둑처럼 앞으로 걸어나가면서도 발자국을 빗자루로 쓸어 나인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 꽤 오래 골몰해 온 셈이다. 지난 날을 되돌아봤을 때,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 번 바뀌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앎’은 의미 없이 쌓였다가 폐기된 반면 내 마음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과 숨기려는 습관은 점점 단단해졌다.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을 읽었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묻지 않고, 훔쳐 보고, 질투했던 내 모습이 또렷해졌다. ‘알고’ ‘행동하지 않는’ 내 기질이 연애뿐 아니라 내 삶 전반을 움직여 온 것처럼 보였다.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얼마 뒤 어딘가 내 소개글을 써야했을 때, “내 생애 절반은 오기와 질투”라고 썼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것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나를 표현하는 데 ‘오기와 질투’는 정말 찰떡인 표현인데, 앞으로 되고 싶은 나를 말하기엔 그만큼 적절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그 뒤에 “나머지 절반은 눈물과 다정함으로 채우고 싶다”고 이어붙였다. 이제는 직접 보고, 울고, 다정한 말을 건네자는 의미에서 그랬다.


아직 ‘눈물과 다정함’보다 나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눈물과 다정함’으로 생을 채우는 데 이르지를 못해서 더 대단한 말을 가져다 붙이기가 겁난다. 한 세기가 또 지난다. 과연 이번에 올 나날은 더 움직이고 직접 묻고 말을 건넬 수 있을지. 이번 매거진의 시작 역시 그것의 일종으로 생각하려 한다. 여전히 ‘나’를 해석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자신의 습관에 단순한 핑계를 대는, 그것도 남 탓을 하는 글을 쓰지만 내일은 더 나아질 수도 있으니 예쁘게 봐주시기를.



예전 글들은 여기저기 중 특히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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