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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Feb 15. 2020

세기의 로맨티시스트 타임

하루에 1초씩 영상을 찍고 있다. G씨가 알려준 어플에 영상을 올리고, 1초 구간을 지정한다. 한 달치 씩 모아 보면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내 영상이니 내게 제일 재밌다. 한 달 다 만들면 보는 게 오래된 일기처럼 더 재밌겠지만, 꼭 영상을 저장할 때마다 지금까지 올린 것들을 재생해본다. 어젠 14일. 그니까 14번째 영상을 저장하고 2월 1일부터 14일까지의 영상을 재생시켜보는 식. 조합이 별로인 것 같으면 바꾸기도 한다. 그러니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그 어플을 통해 발견한 놀라운 사실. 난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외출을 한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거기다 일주일에 6일 정도는 사람들을 만난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려나. 적어도 내겐 아주 신기한 일이다. 난 내가 집순이에다 사람들 만나는 걸 피곤해하는 줄 알았다. 흔히 내향인 외향인을 나누는 기준으로 나는 절대 내향인이라고 자부했다. 누군가를 만나면 꼭 집에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대학생 때부터 나의 MBTI 첫 글자는 쭉 내향의 I였다.(그나저나 난 MBTI에 흥미가 없다. 내 MBTI적 특성을 검색해보려고 하다가 무슨 MBTI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온갖 MBTI 특성들이 모여 서로 INTJ 여자를 만나고 싶네, ENFP 남자를 만나고 싶네 뭐 이러고 있었다.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연애 상대의 특성을 꼽으라면 MBTI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저런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특성을 나타내는 글자는 왜 없는가? 그걸로 거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2020년의 나는 사람들을 만나 힘을 받는 외향인 같다. 외향인 생활 얘기를 해보려 한다.


요즘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며칠씩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곱씹곤 한다. 그 만남이 너무 좋아서. 자꾸 그 기억을 반복하고 싶어 진다. 약속 이후엔 언제 만났냐는 듯 곧 일상으로 나아가기 마련이었는데, 요즘은 일상 속에 친구들 생각이 녹아있다. 그리고 인정한다. 내가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어딘가에 감사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맥주를 앞에 두고 뒷담화를 했다.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뒷담화였다.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참 흠이 많은 친구야, 그렇지만 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흠들이야, 그런 문장을 떠올렸다. 친구가 열불을 내고, 허세로 냉소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 친구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진 계속 만나야겠다. 너 없는 내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게 한 명이 아니다. 어제 만난 A도 마찬가지다. A는 여전히 내가 싫어하는 욕을 자주 쓴다. 걸음이 너무 빨라서 같이 걷기 어렵다. 감쪽같이 거짓말을 너무 잘한다.


그리고

나는 A를

너무

사랑한다.


우리가 점점 자라고 있고, 점점 상대에게 솔직해지고 있으며, 점점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된다는 점이 기쁘다. 우리의 역사가 쌓여가는 것이 즐겁다.


세상이 요즘 장밋빛이다. 거의 세기의 로맨티시스트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인생 중 가장 찐한 로맨티시스트 시기를 공교롭게 인생 중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달력에 기록하고, 스케줄러에도 적어두고, 매일 일기를 쓰고, 하루의 기분을 색으로 나타내고, 1초씩 영상을 찍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 이거 기억에 더 남을 것 같은데?


아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나는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이다. 이것 때문에 서운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술을 많이 마시면서부터 기억을 못 하는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언젠가부터는 친구들의 서운함에 연연하지 않는 뻔뻔한 자아를 확립했다. 기억하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도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같은, 그리고 나랑 술 마실 때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C는 기억을 너무 잘해서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꼼꼼히 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문득 느낀 것이다. C의 비법이 일기는, 기록은 아니었을까! 두둥.


그래서 이 순간들을 더 오래 더 자세히 기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쓰기로 했다. 소중한 날들을, 참 사랑하기 좋은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두고 싶다. 스물여덟 살에 새삼 깨달은, 기록의 또 다른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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