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창체 시간(무엇의 약자일까? 창의와 어쩌구인데)이었는데 미술 선생님이 토론수업을 했다. 첫 번째 주제는 ‘동성애’였다. 교탁 앞으로 나가 수업 전 도착한 선생님에게 이건 찬반 주제가 안 된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자세히 묻지 않고 그럼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어 봤다. 앞문을 열고 나가서 서있었다. 창문 밖으로 나중에 대학교 때 해병대에 갔다가 내부고발을 한 아이(나중에 소문으로 들었다)가 ‘출산율’을 들먹거리며 열심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토론을 펼치는 게 들렸다. 내가 나가있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신경을 안 쓰길래 학교 시계탑에 올라갔다. 혼자 가니까 재미가 없었다. 땡땡이도 쳐본 애가 친다고, 뭘 해야할지 몰랐다. 시계탑에 더 머물지 않고 뒷산을 산책했다.
나랑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조차 기억을 못한다. 좀 더 선언적으로 말해서 수업을 깽판을 쳐놨어야 했나 싶다. 그럼 나중에 어따 써먹을 수 있을텐데...그래서 내가 쓴다. 29살의 나, 지금도 그 정도의 적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그 수업에 참여한 것보단 덜 수치스럽게 해결한 것이지? 처음이자 마지막 땡땡이였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대학 때는 셀 수 없이 땡땡이를 쳤다. 고등학생의 나는 동성애 관련 기사 특정 키보드워리어로서, 호모포비아들과 대항하곤 했다. 동력은 무엇이었나, 한겨레 키드였기 때문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한다.
당시 나는 몇 번의, ‘동성애자세요?’라는 대댓글에 처맞고 ‘동성애자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썼다. 대학교 문학 수업 시간, 최승자의 <Y를 위하여>라는 시를 읽고 좀 울었다. 최승자는 ‘나는 낙태했다’고 썼다. 위악자보다 위선자가 낫다고 생각해왔는데, 도식에 불과했다. 위악자든 위선자든 자신을 반성하는 이가 낫다. 나는 반성하지 않는 위선자였다. 경험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는 이가 나다.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어야겠지. 어쩔 수 없으니까. 사람을 만나는 이 직업이 이해력과 상상력이 부족한 내게 적합하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