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시하는 또 하나의 나는 사라진지 오래다. 다같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검열하느라 그 상황에 있는 것 같지도 않게 느껴지는 일을 이제 걱정하지 않는다. 더이상 ‘여기에 있자’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
그때의 버릇인지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도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꼼짝 못할 때가 있다. 한번 의식하면 그 다음부턴 무시할래도 그럴 수가 없다.
저번 주말에는 카페에 가서 사장님에게 따뜻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다. 직원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리로 가져다 주셨다.
이거 안 시켰는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하는 게 이상한가, 안 하는 게 이상한가. 아무래도 말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그러나 고민하다 이미 말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이미 그는 ‘맛있게 드세요’하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이제 말하려면 저걸 들고 저기까지 걸어가서 제가 주문한 게 이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적극성을 띄어야 하는데...
생각 끝에 말 안 하는 게 더 음흉한 걸로 판단하고도(난 음흉한 게 너무 싫다) 말 안 하기로 결정했다. 조용히 마시고 있는데 사장님이 와서 아까 따뜻한 거 시키지 않으셨어요? 했다.
아, 왜 여기 내가 주문한 게 제대로 안 나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 걸까.
-다시 드릴게요
-아 이미 마셔서 괜
-그럼 이것도 드세요 새로 가져다 드릴게요.
-괜(찮)
-제가 아메리카노라고만 하고 제대로 말을 안 했어요
-괜(찮은데)
-(이미 사라짐)
그래서 먹게 된 두 잔의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사장님은 따뜻한 잔을 가져다 주면서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커피가 달죠?
-아?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달고나 같이 단 맛이 나는데
-아?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면)
-스푼으로 저어드세요. 바디감이 다 가라앉거든요
-(저으며) 아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먹어볼게요)
-(바라봄)
-(한모금 마심) 음~ (정말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달죠? 저어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커피를 두 잔이나 주시고 맛있게 마시는 방법을 알려주시다니. 집에서도 이렇게 먹어볼게요. 어쩐지 항상 커피 다 마시고 나면 밑에 뭐가 가라앉아있더라니...)
-(이미 사라짐)
각자의 행동과 내가 하고 싶던 말을 괄호 안에 넣어보았다. 사장님이 내게 말하는 게 싫지도 않았고 내게 대답할 기회가 없을만큼 말을 빨리한 것도 아닌데 저랬다. 카페 안의 모든 손님이 이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고 사장님이 이런 나를 간파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안다. 누가 지켜보는 앞에서 주책 떨고 싶지 않았던 나(나는 음흉한 나 만큼이나 주책떠는 나를 싫어한다) 주책을 피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끔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