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의개미 Aug 26. 2021

유난한 여름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여름니트라고 써져있어서 샀는데 막상 배송 받으니 두꺼워서 못 입고 있던 가을니트가 있다. 입고 싶어서 매일 최고기온을 체크하고 실망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최고기온 25도 이하인 기념으로 겨우 꺼내입었다. 오늘 입고 다시 더워져 또 며칠 못 입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젠 이번 여름을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같다.


 애칭을 지어달라는 ㅈ에게 마땅한 별명을 지어주지 못했다. 한번 부르면 계속 불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네이밍 센스 오지는 애인처럼 보이고 싶은데 왠지 실패할 거 같아서 결국 아직까지 못 지었다.


 애칭이나 별칭은 꽤나 중요한 문제다. 누군가 나를 개미라고 부르는 순간 좀…거리가 달라지니까. 이제 개미라는 별명은 돌이킬 수 없을 거야. 앞으로는 나를 돌멩이라고 불러달라고 해도 진짜 그렇게 불리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애인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별도의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그 사람한테 부른 건 아니고, 친구들한테 그 사람 얘기를 할 때 별명을 붙여 불렀다. 혹시 누군가 그 사람 얘기하는 걸 들을까봐여서 였다. 짝사랑하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애인 없는 자리에서 애인 얘기를 넘나 많이 한다는 게 부끄러워서 별명으로 불렀다. 경수(실명은 전혀 다른 이름), 당근이, 눈썹이 뭐 그런 식으로다가. 암튼 이런 가치중립적인 말들은 괜찮은데, 저번엔 좋아하는 사람한테 뚝떠리라고 불렀다가 진짜 정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별명을 짓는 데 신중해야 할 이유가 추가로 생긴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ㅈ에게 별명을 지어줘야 한다면, 지금까지는 여름이가 가장 유력후보다. 여름에 만난 사람이라서. 근데 이전에도 아주 여름시작할 때 만나서 여름 끝날 때쯤 헤어진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왠지 여름이라고 지으면 여름 지나면 헤어지는 저주에 걸릴 것만 같고…뭐 그런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걸 생각 중이다.


그래도 미련이 생길 정도로, 올 여름은 정말 유난한 여름이었다.


나 혼자 천지개벽을 했다. ‘K-연애’라고 비웃던 연애의 아주 전형적인 버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하루종일 연락하고 짬나면 전화하고 오늘 세 끼 뭐 먹었는지 다 알고 주말은 애인을 위해 비워두고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애인부터 떠올리고 등등. 이 모든 게 내가 전혀 해보지 않은 것들인데 아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과거의 나는 모 선배가 “나는 경민씨 같은 사람이랑 절대 연애하기 싫다”고 면전에 대고 말할 정도로 애인과 관계맺기에 경험과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게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지만 어찌 됐든 어떤 모양이로든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곧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나랑 이런 게 안 맞아서, 저런 게 부족해서, 성향이 달라서, 결혼을 하고 싶어해서, 뭐 다 완벽하면 그냥 내가 시간이 없어서 결국은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졌으니 이걸 사귀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러던 날 자꾸만 엉겨붙고 싶은, 구질구질하고 너저분한 마음이 내게도 생겨버렸다. 두 달 전쯤 어느 일요일, 남방을 입고 ㅈ을 처음 만났다. ㅈ는 흰티 위에 분홍색 남방을 입었다. 나는 흰티 위에 하늘색 남방. 둘다 컨버스를 신었는데 ㅈ은 나중에 이 얘기를 하면서 운명 아냐? 하면서 낄낄 웃었다. 나는 ㅈ을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일요일이지만 근무하는 날이었고, 나는 만나기로 한 공연장 겸 카페에 미리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도 업무가 계속 돼서, 약속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바깥에 있는 흡연구역에 앉아 캡이랑 통화를 했다. 그때 ㅈ이 나타났다. ㅈ은 내가 그 공연 보여주는 사람인가 하고 나와 두리번거렸다. 나는 살짝 고개인사를 하고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초면인데 까딱까닥이 첫 인사라니. 공연 전후로 나만 맥주를 네 잔 마셨다. 나에 대한 얘기를 마구잡이로 던져댔다. 공연장을 나서면서는 담배를 함께 피우겠냐고 물었고, ㅈ은 자긴 안 피우지만 피우고 싶으면 피우라고 했고, 나는 혼자 피우면 재미 없을 것 같아서 안 피웠다. ㅈ과 함께 홍대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ㅈ은 한 5분 차이라며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줬다. 지하철에서 헤어지기 전에 일회용 카메라로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ㅈ의 사진을 찍었다. 연락이 끊겨도 나중에 사진 인화해서 돌려주는 척 연락하려는 개수작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ㅈ은 그날 여러모로 내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술도 취했겠다, 공연은 재밌었겠다, ㅈ이 맘에 들겠다, ㅈ이 집 근처 역까지 델다 줬겠다, 토끼 걸음으로 뛰어서 집에 왔다. 여름이 막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늘 휴가를 낸 ㅈ은 자다 일어나 출근하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줬다. 가방을 대신 메줬다. 역에 도착해서는 가방을 돌려주면서 내가 가방 양쪽 어깨끈을 다 걸치기 전에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어제는 자다가 화장실에 가면서 불을 켜면 내가 깰까봐 깜깜한 화장실에 들어간 뒤에 손을 문틈 사이로 빼서 스위치를 누르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집요한 다정함은 나에겐 영 부족한 면이라 ㅈ에게 발견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누가 보지 않을 때에도, 누가 볼 때도 다정한 ㅈ을 본다. 본인이 보지 않아서 티가 안 날까봐 덜 다정한 나, 다른 누가 보기 때문에 왠지 부끄러워서 덜 다정한 나를 들여다 본다. 나는 그래서 ㅈ에게 너가 이럴 때 나는 이런저런 마음이 들었어. 고맙고 감동이었어 라고 자꾸 설명해본다. 그치만 한편으로는 ㅈ에게 자꾸 다정하다고 말하는 것이 다정함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까봐 쪼끔 겁이 난다. 그냥 무리하지 말고 생긴대로 두면 좋겠다.


 그것과 별개로 ㅈ은 내 방 화장실과 인연이 드럽게 없다. 저번엔 술 먹고 변기 뚜껑을 부수더니 이번엔 수건을 빨다 세면대 물마개를 막았다. 사실 변기 뚜껑은 원래 조금 커서 흔들리던 참이었다. 물마개도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아 모양만 유지하게 살짝 걸쳐 놨다. 그러니 조금씩은 다 맞지 않고 불안정했던 것들이다. ㅈ이 제대로 끝장을 냈을 뿐. 변기 뚜껑은 그냥 한쪽이 고장난 채로 쓰려고 하고 물마개릉 고치기 위해 평일 언젠간 배관공을 부르려고 하는 내가 있다. 그리고 변기 사이즈를 줄자로 잰 다음에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배송이 오자 조립하고, 물마개는 뽁뽁이(흡착기)가 있으면 된다는 걸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아낸 다음에 집에 뽁뽁이가 하나도 없는데도 결국엔 뽁뽁이 비슷한 걸 찾아내 이백번 정도 누르더니 조금은 위치가 변한 물마개를 내려다 보며 내일 좀더 작은 뽁뽁이를 다이소에서 사오면 해결될 거 같다고 조금은 마음 놓인 표정을 보이는 ㅈ이 있다. 유사 뽁뽁이로 물마개를 뽑아내려고 계속 손을 움직이는 ㅈ에게 집요함이 너무 귀엽다고 했다. 그랬더니 ㅈ은 자기가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며 지금은 내가 자길 좋아해서 그렇지 나중엔 지긋지긋해 할 거라고 그랬다. 세상에서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젤 겁나고 싫기도 하지만 일단 무엇보다 네가 하고 있는 게 쓸데 없는 일도 아닐 뿐더러 이 순간에는 너의 집요함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갑자기 책장으로 가서 김쿠크씨 이야기를 읽어줬다. <맨손>이란 독립출판 잡지에 수록된 남편 자랑 에세이인데, 김쿠크씨가 남편이자 이 글의 주인공이다. 김쿠크씨는 매일 저녁 8시에 알람을 맞춰뒀다가 알람이 울리면 휴대전화를 꺼내 자기 발 사진을 찍는다. 이 매일의 사진으로 전시를 할 것도 아니고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장면의 김쿠크씨가 얼마나 사랑스럽게 읽혔는지 모른다. 나도 김쿠크씨에게 반해버릴 정도로. 이 부분을 ㅈ한테 읽어줬다. 그리고 생산적이지 않은 일, 자기만의 일에 꾸준한 사람이 좋다고 말했던 거 같다. 근데 그러고 나서 이 글을 마저 읽다가 더더 좋은 구절을 찾았다.


“아직 더 관찰해봐야 알겠지만 김쿠크 씨는, 그러니까 내 남편은, 추억을 사진이나 글로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고 사소한 것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예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람이지’라며 박아두고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오늘 싫었던 색깔이 내일 좋아질 수도 있는 것처럼 변해가는 그를 그저 오래 지켜보고 싶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관계성도 바뀌어 가겠지만.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서로를 이해하고 궁금해하며 함께 늙어가고 싶다. 그렇게 나의 김쿠크 씨 관찰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ㅈ이 다정하고, 집요하고 그밖에 어쩌고저쩌고 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그런 면들을 너무나너무나 사랑하고 있다. 동시에 ㅈ이 조금은 덜 다정하고 무심하고 많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그 사람의 어떤 면이 내게 맞느냐 안 맞느냐, 이걸 따지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내게 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 이게 정신없고 덥고 바쁘고 유난했던 올 여름을 마치며 하는 생각이다.

여름 동쪽
양화대교
옥수수맨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