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를 싫어하는 마음

by 오월의개미

다정함에 대한 원고를 의뢰 받았을 때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이미 너무 다정해서 더 다정하다간 겨우 자기 자리까지 모두 내어줄 것 같은 사람들만 다정을 향하고, 조금도 다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은 채 해악을 떨치는 세상이 아닌가요. 그래도 여전히 다정을 말해야 할까. 애초에 다정이 뭘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어제와 오늘 만난 이들과 장면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격주 월요일 씁니다.



주말이면 부모님과 차를 타고 근교로 나갔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그곳에 우리 가족의 텃밭이 있었다. 5평짜리 텃밭을 배정받아 때론 우리끼리, 때론 친구네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 서울토박이이자 아파트키드인 자식을 쌀 한 톨에 고마움을 느끼는 인간으로 기르기 위한 양육자의 노력이었다. 딸이 흙과 햇빛과 식물의 시간을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몇 주에 한 번씩 자식들을 텃밭으로 실어날랐다.


봄이면 상추와 깻잎씨를 뿌리고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의 모종을 심었다. 매일의 돌봄 없이도 작물들은 자랐다. 몇 주 새 무성해진 텃밭을 보면 압도됐다. 지난달 땀 흘리며 심은 상추가 어느새 손바닥보다 커진 데 대한 신비로움, 육체노동에 담긴 성스러움, 밭을 일궈낸 뿌듯함보다 자주 느낀 것은 두려움이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아래로 깊숙이 뿌리 내려 웬만한 힘으로는 뽑아낼 수 없는 존재가 된 식물들 앞에 자꾸 움츠러들었다.


식물보다 더 무서운 건 벌레*였다. 그전부터 나는 웬만한 어린아이들은 좋아하는 나비조차 무서워하는 벌레혐오자였다. 등굣길에 흰 나비가 팔에 앉자 너무 놀라서 손날로 쳐냈는데,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는지 나비가 날개와 다리로 절단난 적도 있다. 그런데 텃밭에서는 비교적 '예쁜 벌레'인 나비만 나타나면 다행이었다. 흙과 식물은 난생 처음 보는 갖가지 곤충과 절지류의 삶터였다. 작물 위에 앉아있는 애벌레, 땅 속에서 고개를 내민 풍뎅이, 때때로 날아드는 나방까지. 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크기와 생김새의 벌레들이 코앞에 나타나거나 내 몸을 타고 올랐다. 나는 벌레를 마주치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모두를 놀라게 한 뒤 도망간 길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은 매우 잦았고 밭일은 엄마아빠의 몫이 되곤 했다.


영화 <미이라> 속 빌런 이모텝은 갖가지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적이나 부하에게 형벌을 내리는데, 그중 식인 풍뎅이를 이용한 벌이 가장 끔찍했다. 모래 속에서 떼 지어 등장한 풍뎅이 떼가 사람의 눈, 코, 입으로 들어가 피부 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그 사람을 먹어 치우게 했다. 나는 영화 속 장면처럼 손톱만한 벌레들이 날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방방 뛰었다.


벌레를 싫어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말농장은 관뒀지만 벌레들은 불쑥불쑥 도시의 삶을 침범했다. 호기롭게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보기 좋게 당했다. 바퀴벌레와 돈벌레가 작은 원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돈벌레와 바퀴벌레는 한 집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우리 집에서 영역 전쟁이라도 벌이는 건지 새벽이면 번갈아 등장했다. 자다가도 번뜩 눈을 떠 불을 켜는 일이 잦아졌다. 느릿느릿 흰 벽을 기던 벌레는 갑자기 켜진 형광등 아래 가만히 멈춰섰다. 그들을 잡거나 쫓아낼 수 있을리 없었다. 조용히 옷을 챙겨입은 뒤 택시 할증요금을 내고서라도 친구 집으로 달려가 잠을 청했다.


방역업체를 불러 약을 쳐보기도 했다. 이전엔 살아서 서로를 지나쳤다면 이제는 내가 직접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는 점만 달라졌다. 알고 보니 곤충들은 아랫집인 식당의 젖은 박스 안에서 무한생성되고 있었다. 온갖 틈새와 통로를 통해 새로 살 곳을 찾아온 그들은 방역업체가 설치한 약을 집어먹고 집 구석구석에서 영원히 잠들기를 반복했다. 나는 결국 월세가 싸고 이웃들이 아름다웠던 그 집을 벌레 때문에 떠났다.


벌레를 싫어하는 게 나만의 일은 아니다. 대벌레, 동양하루살이, 붉은등우단털파리(러브버그)는 도시의 불청객으로 여겨진다. 서울 은평구 봉산을 뒤덮은 대벌레, 성수 번화가와 잠실 야구장에 다닥다닥 붙은 동양하루살이, 이제는 수도권 전역으로 퍼진 러브버그를 서울시는 '생활불쾌곤충'으로 정의했다. 물거나 전염병을 옮기지 않아 '익충'으로 분류되는 곤충들을,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일상 속 불쾌감과 사회적 불편을 유발한다"며 '해충틱'한 용어를 만들어 통칭하기 시작했다.


환경을 취재하게 되면서 이 '생활불쾌곤충'과 이들의 서식지를 가까이서 볼 일이 생겼다. 가장 먼저 들여다본 건 대벌레가 몇 년째 대발생했다던 은평구 봉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서 있는 나무들에 타카심이 박혀있거나, 아래위로 큰 칼자국이 나 있었다. 벚나무 같이 껍질이 얇은 나무들은 상처가 나다 못해 껍질이 돌돌 말린 사이로 곰팡이균이 퍼져 있기도 했다. 모두 대벌레를 잡기 위한 ‘끈끈이 롤트랩’을 설치하고 제거하다가 생긴 흔적이다.


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나무줄기 모양의 대벌레가 산책로의 나무와 길을 뒤덮어 관련 민원이 쏟아졌다. 구청은 해마다 20~30cm 정도의 양면테이프인 끈끈이 롤트랩을 나무에 둘둘 감고 타카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대벌레가 달라붙게 한 뒤 대발생 시기가 지나면 테이프를 뜯어내 제거하기 위해서다. 살충제 같은 화학약품을 뿌리지 않아 ‘친환경’으로 분류되는 방제법이다. 구청은 찬 바람이 불고 대벌레가 사라지면 롤트랩에 칼집을 내 뜯어냈다. 롤트랩에는 대벌레뿐 아니라 다른 곤충과 작은 새까지 온갖 생명체가 달라붙었다. 롤트랩을 붙이고 떼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대벌레가 특정 나무에만 지나갈 리 없는데, 산책로 주변 나무에만 롤트랩이 감긴 흔적이 있었다. 산책로에서 벗어난 나무에 롤트랩을 감으려면 비탈길에 매달리는 등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짐작됐다. 전시 행정이라도 매년 이뤄지는 건 민원 때문이다. 대벌레가 무섭지만 산책로는 오가고 싶은 사람들이 넣었겠지.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텃밭을 싫어하던 어린이는 커서 등산 좋아, 자연 좋아, 식물 좋아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등산을 가고 매일 창가 식물들에게 물을 주지만 여전히 벌레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지구상 생물 종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곤충을 싫어한다면, 내가 진짜 '자연'을 좋아하는 게 맞을까? 식물도, 산도 벌레 없이 존재할 수 없는데 전체가 아닌 일부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취할 수 있을까?


곤충 대발생이 왜 발생하는지,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많은 경우 해를 거듭할수록 개체 수가 조절되면서 자연히 줄어든다. 곤충을 잡아먹는 천적도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밀집도가 조절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수명이 짧은 곤충일수록 번식을 위해 짧은 기간 많이 '발생'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러브버그나 동양하루살이가 그렇다. 동양하루살이는 유충 시절엔 강물 아래 살다 짝짓기를 하기 위해 아성충(성충이 되기 위해 탈피하기 전 상태)이 돼 물 밖으로 날아오른다. 이 때부터의 수명은 하루남짓이다. 도시의 불빛에 이끌려와 근처 벽에 붙어 탈피하고 성충이 된다. 5월에서 6월 초에 가장 많이 우화하고,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활동한다. 강변 산책을 하고 싶거나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면 이 시기를 피하면 된다. 꼭 이 때 노상 식사를 즐기거나 산책을 하고 싶다면 강변의 밝은 지역을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곤충학자들이 말하는 '참아주기 전략'이다.



지난 5월 말, 서울 성수동에서 동양하루살이를 시민과학자, 곤충학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관찰했다. 벌볼일없는사람들의 조수정 선생님이 선생님도 벌레라면 끔찍했다고,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다 보니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동행한 시민들과 하루살이가 탈피한 껍질을 만지고, 성충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상인들이 물을 뿌려 바닥에 하루살이들이 떼로 죽어있는 곳에서 한 시민이 그 중 살아있는 개체를 손에 얹어 밟히기 전 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루살이 한 마리가 내 앞머리 위에 앉았는데, 놀랍게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제대로 탈피할 곳을 찾아주려고 머리 위에서 떼어내 건물 벽에 붙여 주었다. 하루살이의 몸짓이 징그럽지 않았고, 닿아도 별 일 없다는 걸 알게 되니 안심이 됐다.


어떤 곤충인지 알고 나니, 가까이서 들여다 보고 나니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낯설고 불편한 타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마음도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상상한다. 나를 침범하거나 해할 것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SBS 이경원 기자에 따르면 하버드대 정치심리학자인 라이언 에노스는 히스패닉에 대한 백인들의 인식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 이런 실험을 설계했다. 불법 이민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백인들을 실험에 참여하게 해 그들의 통근 열차에 멕시코 출신 히스패닉 2명을 동승시켰다. 2주 후, 백인들은 히스패닉에 대한 반감이 커진 모습을 보였다. ‘불법 체류’ 문제가 심각하다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 이민자 수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낯선 이들이 삶에 들어온 것만으로 공포를 느꼈다.


에노스는 실험 결과를 더 들여다봤다. 히스패닉과 3일간 동승했던 사람의 반감이 가장 컸고, 오래 접촉할수록 반감의 정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계속 접촉하고 소통한다면, 두려움과 반감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루살이를 며칠간 마주쳤을 때의 마음과 하루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봤을 때의 마음은 다를 수 있다.


'없앨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혐오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그게 아주 하찮게 여겨지는 곤충일지라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다. 곤충을 방제하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면, 목표 곤충 외에도 다른 곤충들이 죽어 나가고 생태계가 교란된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이나 반려동물에게도 유해하다. 목표는 이루지도 못하고 나에게 악영향으로 돌아온다. 곤충 대발생 기사나 SNS 게시글에는 으레 '왜 방제를 안 해 주냐'라는 댓글이 달리지만, 각 지자체가 방제를 안 하는 것이라기보단 못 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공존은 목표라기보다 현실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집 바닥을 기어다니는 커다란 검은 벌레와 마주쳤다. 소리를 지르긴 했다. 그리고 한번 들여다봤다. 바퀴벌레가 아니었다. 하늘소 종류 같았다. 종이에 올라오게 해 베란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다음 날 무당벌레가 나타났을 때도, 요동치는 마음을 꾹 참고 바라봤다. 덜 두려워하는 곤충은 아직 개미, 동양하루살이, 러브버그, 무당벌레 정도지만 점점 곤충에 익숙해지고 있다.


*벌레와 곤충은 다르지만 이 글에서는 혼용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