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호텔 1층에 내려가서 밥(햇반)을 데워왔다. 한국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었지만 이곳 영국 런던은 이제 (몇시야? 일어나 핸드폰을 열어본다) 오후 5시 8분이다. 오후 해가 편안한 자세로 기울고 있다. 너무 일찍 저녁을 먹는거 아니냐 물을 수 있겠지만 아까 여기 시간으로 아침 8시에 밥 먹고 이게 두번째 밥이다. 비행 가면 거의 두끼만 먹는다. 시차가 뒤죽박죽이다보니 밥보다 잠이 더 고프다.
주변 승무원들을 보면 가방에 이것 저것 먹을 것을 싸가지고 다니던데, 나는 거의 현지에서 조달해 먹는 편이다. 싸가지고 다니는게 귀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싸간 음식이 대부분 인스턴트다 보니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가끔 라면이나 햇반 같은걸 가방에 넣곤 하지만 안먹고 그냥 가지고 온다. 지난 번 샀던 잔치 국수님도 런던, 델리,하와이, 마드리드 순방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귀국,지금 부엌 서랍에서 편히 쉬고 계신다.
"싸갔으면 먹고 와야지 왜 안먹어?" 4개국을 거치는 동안 포장도 뜯기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국수님을 보고 아내가 한마디한다. 아내는 국수 사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비상 시'를 대비해야 한다며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국수를 사고 말았다. 그치만 그녀의 몸에서 향수 대신 공장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수 개의 나라를 함께 하는 동안 그녀의 몸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내가 이번 런던 비행을 오면서는 바리바리 싸왔다. 햇반 3개 (몸에 좋으라고 잡곡밥으로), 새우탕면 2개, 우동 1개, 즉석 떡볶이 1개 (코로라라지만 떡뽁이는 먹고 싶어), 김 3개, 볶음 김치 3개, 고등어 1개, (또 뭐있나 가방을 뒤져본다. 뒤진 후) 멸치볶음 1개, 전복죽 1개, 호박죽 1개, 그리고 1리터 물 2병...
이게 다 그 코로나 때문이다. 식당, 카페, 커피숍 모두 문을 닫았다는 말에 잔뜩 싸가지고 왔는데, 몇몇 식당이 연 걸 보고 '괜히 싸왔나?' 약간 후회를 했다. 그래도 곁에 먹을 것이 있으니 언제든지 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 좋다. 런던 체류 삼일째인 오늘까지 햇반 3개, 김 1개, 김치 2 봉지, 떡복이 1개, 고등어 1마리...(그리고 또 뭘 먹었지? 휴지통을 살펴본 후 그게 다네) 를 해치워 버렸다.
이제 전복죽 호박죽 각 1개, 새우탕면 2개, 우동 1개, 김치 1봉지, 김 1봉지가 남았는데 내일 런던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전복죽과 김치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집으로 가져가겠지. 아내가 또 한마디 하겠다. "이걸 또 왜 남겨 왔어!"
평소에는 그냥 현지 음식을 사먹는다. '먹는거에 돈 아끼지 말자'는 주의지만 먹는 거에 큰 욕심이 없는 편이어서 10불에서 30불 내외의 범위 내에서 편하게 먹는다. 맥주까지 곁들이면 40불, 많게는 50불도 나올때도 있지만 비행을 마친 나에 대한 작은 선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먹고 싶은 거 돈 생각하지 않고 (10불에서 20불? 아니, 50불 짜리도 먹는다니깐!) 맘껏 먹는다.
해외 체류 시 승무원은 현지 체류비로 퍼듐 (PERDIEM)을 받는다. 현지 물가를 고려해 시간당 몇 불, 이런 식으로 계산되는데 우리 회사가 취항하는 도시 중에서 런던 퍼듐이 젤 쎄다. 보통 3박 4일 런던 비행을 오면 퍼듐이 (얼마지?) 25만원? 쯤 나온다. 그만큼 물가가 비싸서 많이 나오는거겠지만 호텔 뷔페 먹고 먹을 거 싸오면 25만원을 그냥 버는거다.
지금 나는 코로나 때문에 평소에는 절대 없을 런던 4박 5일 비행을 왔는데, 이 비행도 퍼듐이 거의 30만원쯤 된다고 동료 승무원이 말해줬다. 그녀는 3주 전에 5박 6일 스케줄로 런던을 왔었다는데, 5박 6일이면 퍼듐이 40만원쯤 되니 그녀의 이번 달 퍼듐 통장에는 70만원이 넘게 찍힐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틈틈이 떡복이와 고등어 구이. 볶음 김치, 멸치 볶음을 반찬삼아 잡곡밥을 한 그릇 비웠다. 배가 부르다. 밥 기운으로 다음 글을 써야겠다. 창 밖은 여전히 해가 3/5쯤 누울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햇님도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지고있다.